예천 향석리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문화·유적

- 멀리서 바라본 보호각과 석탑

예천군(醴泉郡) 용궁면(龍宮面) 향석리(鄕石里)에 구읍(舊邑)마을이 있습니다. 마을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곳은 예전에 용궁면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 마을 뒷산이 축산(竺山)입니다. 그래서 신라 때는 용궁을 축산이라고 했습니다.

1413년부터 1856년까지 약 440여년간 용궁현청(龍宮縣廳)이 있었는데, 1856년 6월 영남지방의 대홍수로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범람하여 현청이 유실되자 이듬해에 현청이 읍부리(邑部里)로 옮겨갔습니다. 그 후로 마을이 쇠락했습니다.

- 향석리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옛 관아터인 향석초등학교(지금은 폐교) 옆에 석탑과 석불이 있습니다.

- 향석리 삼층석탑

탑은 보호각 앞에 있습니다. 탑이 원래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 향석리 삼층석탑

탑은 자그마하지만 예쁩니다. 얼핏 보면 단층기단의 삼층석탑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층기단의 삼층석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기단부

하대갑석만 노출되어 있고, 그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 있습니다. 추측건대 하대갑석 아랫부분은 소실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대갑석 윗면은 경사가 져 있고, 그 위에 상층기단 면석이 놓여 있습니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면마다 모서리기둥과 1개의 가운데기둥이 있습니다. 상대갑석 윗면에도 경사가 져 있고, 아랫면에는 얕은 부연이 있습니다.

- 몸돌 받침

상대갑석 윗면에 별석으로 된 몸돌 받침이 있습니다.

- 몸돌 받침

별석으로 된 몸돌 받침입니다. 주로 고려 시대 석탑에서 볼 수 있는 양식입니다.

- 탑신부

1층 몸돌, 1층 지붕돌, 2층 몸돌은 각각의 돌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2층 지붕돌과 3층 몸돌은 같은 돌로 되어 있고, 3층 지붕돌과 노반도 같은 돌로 되어 있습니다.

- 지붕돌

지붕돌 아랫면의 층급받침은 4단이고, 절수구가 뚜렷합니다.

- 상륜부

상륜부에는 노반 등이 남아 있습니다. 

노반 아랫부분은 3층 지붕돌과 같은 돌이고, 노반 윗부분은 복발과 같은 돌이며, 그 위에 앙화에 해당하는 부분이 놓여 있습니다.

- 향석리 삼층석탑

기단부에서 면석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혹시 무너질까 걱정스러운 것은 제쳐두고 마치 앞니가 서너 개 빠진 것처럼 볼썽사납습니다.

- 향석리 석불좌상

석불은 석탑 뒤쪽에 있는 보호각 안에 있습니다.

오랜 세월 노천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1914년에 '보광전'이란 현판을 단 보호각을 세워 옮겨 놓았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 말 축산부원군이었던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 1288~?)이 마을에서 분쟁이 자주 일어나자 이를 지리적 영향이라 믿고 부처님의 자비로 막아 보려는 의도에서 이 석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 향석리 석불좌상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오른쪽 어깨에 편삼이 있습니다. 무릎이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습니다. 어깨가 동그스름하고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으며 조각선이 섬약하여 여성적입니다.

대좌는 상대석만 남았습니다. 가운데에 새겨진 연꽃잎은 정면을 향하게 처리하였고, 좌우로 갈수록 비껴지게 하였습니다. 고려 시대 연꽃무늬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 세부

풍만한 둥근 얼굴에 눈이 반쯤 감겨 있고, 코는 떨어져 나간 것을 보수하였습니다. 

- 세부

목이 떨어져 시멘트로 붙여 놓았는데, 그래도 삼도의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 세부

수인은 오른손 손끝을 땅을 향하고 왼손을 무릎에 올려놓은 항마촉지인을 하였습니다.

- 세부

왼팔은 옷에 가려졌으나, 오른팔은 맨살이 드러나 있습니다. 맨살이 드러난 손목에 팔찌를 꼈습니다. 이 앙증맞은 팔찌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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