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덕봉정사 문화·유적

- 마동

경주 토함산 서쪽 자락에 마동(馬洞)이 있습니다.

마동 지명은 마을이 말 모양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설과 조선 시대 마동 인근에 방어리역(防禦里驛) 등이 있었는데 역참(驛站)에 사용되는 말을 먹이는 마을이라는 데서 나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곳은 용동으로 불리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마을에 잦은 참상이 발생하여 마을 사람들이 원님에게 고하니 원님이 갇혀 있던 용이 천 리 길을 달리는 말처럼 승천하라는 뜻으로 마동으로 고쳐 지어준 후 지금까지 계속 마동으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 덕봉정사

지금은 폐역이 된 불국사역이 있는 구정동(九政洞)에서 불국사 쪽으로 가다 보면 경주문화재연구소가 있고, 조금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로 들어서면 소나무 숲이 있습니다.

소나무 숲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왼쪽에 규모가 꽤 큰 무덤이 있습니다. 덕봉(德峰) 이진택(李鎭宅)의 무덤입니다. 무덤 앞에는 큰 연못이 있으며, 그 옆에 정자가 있습니다. 덕봉정사(德峰精舍)입니다.

- 덕봉정사

덕봉정사는 조선 정조 때 문신이었던 이진택을 추모하여 세워졌습니다.

덕봉정사는 구정동 지금의 경주온천관광호텔 뒤편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후 1905년에 이진택의 증손인 야은(野隱) 이우영(李祐榮)이 이곳 마동에 지금의 정자를 세웠습니다.

- 덕봉정사

건물은 토함산 기슭인 주변 환경을 감안하여 'ㄱ'자형으로 지어졌습니다.

- 덕봉정사

건물 중앙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들이고, 연못 쪽으로 누마루를 내었습니다. 누마루와 대청마루는 툇마루로 이어지게 하였습니다.

- 주춧돌

건물 주춧돌입니다.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원래는 석등 하대석으로 쓰였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현판

덕봉(德峰) 이진택(李鎭宅, 1738~1805)은 낭만적인 문인이자 소신 있는 행정가이며 세상을 바꾸려는 개혁가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과거에 낙방하자 금강산을 다녀와 금강산유록(金剛山遊錄)을 남겨 이름을 얻었고, 노년에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를 가는 와중에도 관동팔경을 돌아보며 시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시노혁파(寺奴革罷)를 골자로 하는 사대직겸진시노혁파소(辭臺職兼陳寺奴革罷疏)를 올려 관철함으로써 조선 땅에서 관청의 공노비를 없앴습니다.

그는 정조 재위 시절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예조 정랑(禮曹正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습니다. 정조의 신임을 얻어 백련을 선물 받았고, 왕궁이 있는 세심대에서 왕과 함께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시문이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정조가 죽은 뒤 65세의 나이에 최악의 유배지인 함경도 삼수로 귀양을 가는 굴곡진 삶도 살았습니다.

- 현판

덕봉정사 방은 두 칸입니다. 서쪽 방은 이진택의 호를 따서 덕봉헌(德峰軒), 동쪽 방은 경모재(景慕齋)라 하였습니다.

- 처마

한옥의 멋을 보여주는 처마입니다. 경쾌하고 날렵합니다.

- 덕봉정사

이진택은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가면서 관동팔경의 마지막인 총석정을 끝으로 꿈에도 그리던 관동팔경을 다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임금님의 은혜라며 자신에게 유배형을 내린 순조에 대해 충정 어린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팔경이 바다와 접해 있어 어느 것 하나 절경이 아닌 곳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죽서루는 하얀 모래 위에 맑은 냇물이 못을 이루었고, 기암괴석은 좌우로 십 리 골짜기를 이루었는데, 넓은 바다와 어우러져 한 번만 보아도 심신이 상쾌해진다. 이곳이 강산의 제일이며 관동의 절경이다. 갑오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고 경성으로 돌아갈 때 이곳을 보지 못했기에 평생을 두고 소원했는데, 이번 귀양길에 곳곳을 다 보게 되니 이 또한 임금님의 은혜라 아니 할 수 없다.

* 참고 글: 김동완의 경주 덕봉정사(德峰精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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