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자천공소와 자천교회 문화·유적

- 자천공소

영천(永川) 자천리(慈川里)는 화북면의 면 소재지입니다. 이곳 마을 들입의 하천가에 오리장림(五里長林)이 있습니다. 1500년대 주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이 숲은 자천숲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숲을 지나 자천교를 건넌 후 마을로 들어서면 좁은 도롯가에 식당, 다방, 학교, 새마을금고, 약방, 면사무소, 슈퍼, 파출소, 우체국 등과 같은 나지막한 건물들이 이어집니다.

자천초교 부근 도롯가의 '자천공소'라 쓴 표지판을 따라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면 자천공소(慈川公所)가 있습니다. 공소(公所)는 본당보다 작아 본당 주임 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 공동체를 말합니다. 자천공소에는 크지 않은 성모상이 정면에 있고, 그 뒤로 단순하지만 예쁜 박공지붕의 분홍색 공소 건물이 있습니다.

- 자천공소

마당의 오른쪽에 한옥 두 채가 'ㄱ'자형으로 있습니다. 이 한옥은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입니다. 자천공소가 이곳에 들어선 지 80년이 지났는데, 예전에 공소 건물로 이 한옥이 쓰였다고 합니다.

- 자천공소

한옥 두 채 사이에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약 백 년 된 나무라 합니다. 

- 자천교회

자천공소에서 직선거리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자천교회가 있습니다. 자천공소를 나와 시멘트 담장의 골목을 따라 더 들어가서 그 골목의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낮은 흙돌담으로 둘러싸인 자천교회가 있습니다.

- 자천교회

자천교회의 설립자는 권헌중입니다.

그는 경주 작은 고을 선비로 서당 훈장으로 생활하다가, 거처를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로 옮겼습니다. 그 뒤 다시 대구로 이사하기 위해 청송에서 영천으로 넘어오는 노귀재를 향했습니다. 노귀재에서 머물던 1897년 4월에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선교 여행을 하고 있던 안의와(James Edward Adams) 선교사와 처음 만났습니다. 이곳에서 권헌중은 안의와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권헌중은 대구로의 이사를 포기하고, 자천리에 초가 한 채를 사서 자신의 초가집 사랑방에서 낮에는 한문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노비와 머슴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자천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 신자가 점점 늘어나자 새로운 예배당이 필요했지만, 동네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권헌중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세워주는 조건으로 교회 건축을 허락받았습니다.

- 신성학당

지금의 교회 건물이 세워진 시기는 1904년경입니다.

1913년경에 서당을 폐하고 2년제 신성소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신성소학교는 교회학교로서 당시 우리 사회에 근대식 학교가 드물었을 때 근대식 공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교육하는 놀라운 일을 하였습니다.

- 자천교회

자천교회는 해방을 전후해서 교인 수가 300명에 이르는 부흥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불어닥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우익과 좌익의 분쟁이 교회에도 불어닥쳐 어려움을 당해 점점 쇠퇴하였습니다.

- 자천교회

신성학당 쪽에서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아치형 문이 있습니다. 그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나무 십자가가 잠시 마음을 빼앗습니다.

- 예배당

예배당은 세울 당시에 출입문은 물론 예배당 내부도 남녀를 구분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출입문의 남녀 구분을 없애고, '예배당'(禮排堂)이라 쓴 현판을 걸었습니다.

6·25전쟁 때 인민군이 한때 이곳을 차지해 교회 건물을 사용하면서 미군의 공습으로 교회가 폭격을 맞을 위기에 처하자 지붕에 횟가루로 'CHURCH'라고 표시해 폭격을 막기도 했습니다.

- 예배당

예배당은 우진각지붕의 목조 단층 건물입니다.

- 현판

예배당 현판입니다. 요즈음 교회 건물 현판으로는 보기 드문 모습입니다.

- 예배당

예배당 옆모습입니다.

예배당은 주 출입문을 측면에 두고 남녀의 출입문을 따로 두었고, 예배 공간도 건물 내부 중앙부에 칸막이를 설치하여 남녀석을 구분하였습니다. 이것은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한 것입니다.

- 종탑

지금의 종탑은 광복 후인 1948년에 새롭게 세워진 것입니다.

예전의 종탑은 서학수 면장 부인의 헌금으로 세워졌습니다. 시계가 드물었던 당시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는 마을의 시계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무기를 만들기 위해 종을 강제로 공출해간 후 광복이 될 때까지 종이 울리지 못했습니다.

- 예배당

이제 자천교회가 세워진 지 110년이 더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자천교회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할 때의 초심을 잃지 않고 옛 모습을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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