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계고택과 채미정 문화·유적

▲ 어계고택 전경

남 함안의 원북리는 함안땅 어디나 그러하듯 여느 시골 마을과 다름없어 보이나 이곳은 조선 초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조려(漁溪 趙旅, 1420-1489)가 태어나고 여생을 보낸 곳으로, 어계고택과 채미정, 그리고 서산서원 등 마을 곳곳에는 그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어계고택은 마을 안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있는데, 현재 후손들이 재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계고택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문채와 원북재(院北齋)라 불리는 재실, 그리고 사당인 조묘(祖廟)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북재 왼쪽 담장가에는 수령이 약 250년이 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가을이 되면 단풍이 원북재 앞뜰을 가득 덮는다고 합니다.
▲ 솟을대문 위에 걸려 있는 정려

조려는 단종 원년(145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해 이곳 함안으로 물러나 죽을 때까지 낚시와 소요로 은거하며 단종을 연모하였습니다.

이러한 어계의 삶을 함안사람들은 중국 주나라 때 불사이군의 충신인 백이와 숙제에 비유하여 원북리 뒷산인 서산(西山)을 백이산(伯夷山)이라고 불렀습니다.

숙종 15년(1689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어계 또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숙종 29년(1703년)에는 경상도 유생 곽억령에 의해 어계사당이 세워졌으며, 숙종 39년(1713년)에는 '서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습니다.
▲ 어계고택의 원북재

원북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一'자형 평면 팔작지붕집인데, 중앙 2칸은 넓은 대청마루이고 좌우는 툇마루가 있는 온돌방입니다. 부엌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살림집으로 사용되었기보다는 별채이거나 사랑채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편 원북재 뒤편에는 조묘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원북재는 사람이 살고 있지않은 탓인지 몰라도 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정돈되지 못하고 퇴락해 보여 안타까웠습니다.

어계고택은 건물의 형태가 비교적 단순하고 검약한 편으로,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평범한 민가 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어계고택이 어계 선생 생전 당시의 건물이 아니고 시대가 한참 지난 후인 조선 후기에 다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 채미정 전경으로, 채미정과 그 뒤 언덕 위로 문풍루가 보입니다.

채미정은 어계고택으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 바로 길가에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려짐에 따라 서산서원이 훼철될 때 서원의 부속정자였던 채미정만 홀로 남았는데, 이 또한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복원되었습니다.

채미정이란 이름은 주나라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만 캐먹으면서 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솟을삼문을 지나 작은 연당을 건너 채미정에 오를 수 있었는데, 솟을삼문 앞으로 철길이 지나가면서 지금은 정자를 둘러싼 담장 왼쪽에 만든 작은 쪽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채미정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진 채미정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방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툇마루로 되어 있습니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처마 밑에는 '百世淸風(백세청풍)'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데 글 내용은 어계의 곧고 맑은 충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채미정과 붙어 있는 언덕 위를 청풍대(淸風臺)라 부르고, 이곳에는 문풍루(聞風樓)란 육각정이 있습니다. 더운 여름날 이곳에 앉아 있으면 한줄기 청아한 바람이 온몸에 젖은 땀을 말끔히 씻어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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