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지 않는 광통교...

▲ 복원된 광통교
▲ 광통교 교각 중 하나로, 계사년에 다시 준천(濬川, 오물과 토사가 쌓여 수로가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벌이는 개천 청소 및 보수 작업)하였다는 뜻의 '계사갱준(癸巳更濬)'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울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옛모습과 가깝게 복원된 다리가 광통교(廣通橋)입니다. 이 광통교에는 오랜 세월 전에 있었던 권력을 둘러싼 미움과 저주의 생생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에겐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태조는 고려의 풍습대로 향리와 서울에 각각 부인을 두고 있었는데, 강씨(康氏)는 바로 서울에 있는 부인이었습니다. 고향에 둔 부인 한씨(韓氏)는 태조 등극 전에 죽었고, 등극과 더불어 왕후의 자리에 앉은 것은 강씨로서 방번과 방석 두 형제와 경순공주를 낳았습니다. 한씨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과 신덕왕후 강씨는 나라를 세우기 전에는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였으나, 나라를 세운 다음엔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사사건건 대립하였습니다.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한성부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 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후히 장사를 지내고, 능 동쪽에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재궁(齋宮)으로 삼고 법석(法席)을 마련하였으며, 대궐에서 정릉(貞陵, 신덕왕후의 능)의 아침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 뒤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과 방석이 죽자, 태조는 정사에 뜻을 잃고 태상왕(太上王)으로 있으면서 자주 정릉에 가서 불공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이때 정릉에는 잡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봉분 주위에 세련된 구름과 당초무늬가 아로새겨진 신장석(神將石)이 둘러져 있었는데, 이 신장석은 고려말과 조선초기 전통문양의 아름다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신의 솜씨라고 감탄한 이 돌조각은 당시 팔도에서 돌을 가장 잘 다루는 제주도 석공의 솜씨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신장석은 나라를 연 개국 왕비의 무덤에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정릉의 광대함에 대해 의정부에서 논란이 있었던 차에 태조가 죽은 뒤로는 이 능에 대한 박대가 노골화하였으며, 끝내 태종 이방원의 뜻에 의해 도성 밖인 성북구 정릉동 현재의 정릉 자리로 이장하였습니다.

그 후 태종 이방원은 흙다리였던 광통교를 돌다리로 개축할 때 정릉을 이장하면서 방치되고 있던 신장석을 뽑아 다릿돌로 썼습니다. 이것은 원수 같은 계모의 혼백마저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라는 뜻이었습니다.
▲ 다리끝받침돌에 사용된 신장석으로 거꾸로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신장석들이 다리 교대석(다리끝받침돌)으로 사용되면서 그 중 일부는 거꾸로 놓여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문양석이 거꾸로 놓여 있는 것은 조선 초기 왕권장악에 있어 신덕왕후와 정적관계였던 태종 이방원의 의도적인 복수심의 산물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낳고 있습니다.

그동안 신덕왕후의 능침을 지켜야할 그 돌조각이 청계도로 아래에서 잠자고 있다가 청계천 복원공사로 다시 햇볕 아래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람은 가고 없어도 당시의 미움과 저주의 흔적은 이렇듯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 광통교 난간에 있는 돌짐승의 모습
▲ 다리끝받침돌에 사용된 신장석
▲ 다리끝받침돌에 사용된 신장석

by 하늘사랑 | 2007/02/12 08:21 | 문화유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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