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3월 11일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황제, 측천무후...

중국 역사상 여성으로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는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유일합니다. 그녀는 뛰어난 정치력 못지않게 권력을 위해서는 자신의 자식까지도 죽이는 포악함도 함께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 1월 23일 - 705년 11월 2일)는 당나라의 제3대 고종(高宗)의 황후로서 이름은 조(曌)이며 산서성(山西省) 출생으로, 당나라 창업에 공헌한 무사확(武士彠)의 딸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武士彠)은 수(隋) 양제(煬帝) 때 목재상이었는데 수양제의 대형 토목공사 덕택으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목재 장사를 하면서 권문세족들과 교분을 두텁게 쌓아 하급 군관으로 들어갔습니다. 617년 당 고조 이연(李連)이 거병을 하자 무사확은 군수관(보급물자 담당장교)의 신분으로 이연을 보좌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이연은 장안을 점령한 후에 그러한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하고 태원군공(太原郡公)에 봉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14명의 개국공신 행열에 들어가 당왕조의 신흥 귀족이 되었습니다.
620년 무사확은 본처가 병으로 사망하자 수왕조 때의 권세가 양달(楊達)의 딸과 재혼하였습니다. 그후 그들은 세 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 중 두번째 딸이 바로 무측천입니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로 14세 때 태종(太宗)의 후궁이 되었으나, 그녀는 성격이 다소 거친데다 여자로서 애교를 부릴줄 몰랐기 때문에 좀처럼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습니다. 태종이 죽자 장안의 감업사(感業寺)의 비구니가 되었는데, 태종의 5주기에 고종이 그 절을 찾았을 때 두사람이 다시 만났고, 그 뒤로 그녀는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곧 황후 왕씨에게 알려졌습니다. 마침 그녀는 후궁 소숙비(蕭淑妃)가 고종의 사랑을 받는 것을 시샘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비구니인 무측천에게 머리를 기르도록 명하고 이어 고종에게 그녀를 궁으로 부르도록 권했습니다. 결국 황후 왕씨로서는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셈이 되었습니다. 그때 무측천은 이미 서른한살이었고 고종보다 네살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터라, 그녀는 이내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그후 그녀는 먼저 궁중 내의 비빈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간계를 써서 황후 왕씨(王氏)를 모함하여 쫓아내고 655년 스스로 황후가 되었습니다.
무측천은 둘째 아이로 아주 귀여운 딸을 낳았습니다. 자녀가 없었던 황후 왕씨는 자주 찾아와서 이 딸애를 데리고 놀았는데, 고종이 올 때 쯤이면 분위기를 파악하고 먼저 나가곤 했습니다. 무측천은 황후 왕씨를 제거하는데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습니다. 무측천은 황후 왕씨가 딸애를 보러 왔다가 먼저 나간 뒤에 자기의 딸애를 목졸라 죽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불로 덮어두었습니다. 이때 고종이 들어오자 그녀는 웃으면서 고종을 맞이하였고, 잠시 후 고종이 이불을 젖혀보니 이미 딸애는 죽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고종은 조금전에 누가 이 방에 왔다 갔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무측천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조금전에 이 방에 왔다 간 사람은 황후밖에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고종은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저수량 등과 같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후 왕씨를 폐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654년 겨울에 고종은 마침내 무측천을 지지하던 이의부(李義府)와 허경종(許敬宗)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폐서인 시킨다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이로부터 6일 후인 10월 19일 무측천은 공식적으로 황후에 책봉되었습니다.
수년 후 무측천은 고종의 건강을 핑계 삼아 스스로 정무를 맡아보며 독재권력을 휘둘렀으며, 문예와 이무(吏務)에 뛰어난 신흥관리를 등용하여 세력을 구축하고 구귀족층을 배척하였습니다. 즉, 무측천은 황후가 된 후에 먼저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장손무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녀는 장손무기에게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명을 둘러씌워 외지로 추방한 다음 자살을 강요하였으며, 그후 장손무기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제거하여 후환을 없앴습니다. 그리고는 '성씨록(姓氏錄)'을 개편하여 자신의 성씨인 무씨(武氏)를 최상에 놓고 문벌을 중시하던 당시의 사회적 풍토 속에 자신의 가문에 대한 위치를 확고히 해 두었습니다.
고종은 무측천의 전횡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급기야는 재상 상관의(上官儀)를 비밀리에 불러서 그녀의 폐위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그러한 고종의 의도를 파악한 상관의는 무측천의 폐위에 관한 조서를 작성하였으나, 황제 측근에 심어둔 무측천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재빨리 그것을 무측천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무측천은 황급히 고종에게 달려가서 갖은 협박과 회유로 고종을 설득한 후 모든 책임을 상관의에게 돌리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녀는 상관의에게 이미 폐위된 태자 이충(李忠)과 반란을 도모했다는 죄명을 둘러씌워 처형하였습니다.
무측천은 비록 심성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찍이 '건언12사(建言十二事)'라는 12조의 건의서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농업발전, 조세경감, 언론확대 등의 비교적 완비된 치국정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라는 조서를 반포하였습니다. 그후 고종이 정사를 처리하는 권한을 무측천에게 넘겨주었던 까닭도 바로 그녀의 이러한 정치적 역량을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측천은 자신의 권세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친자식도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무후와 고종 사이에는 4남 2녀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아들로는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철(李哲, 일반적으로는 이현(李顯)이라고 하지만 둘째의 이름과 우리음이 같은 관계로 여기서는 그의 다른 이름인 이철을 사용하기로 하겠음), 이단(李旦, 이륜(李輪)이라고도 함) 이렇게 4명이 있었습니다.
656년 태자 이충(李忠)이 폐위되자 무측천의 장남 이홍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홍은 착하고 온순한데다 겸손의 미덕까지 갖추고 있어 고종과 여러 대신들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후 고종은 건강이 점점 악화되자 황위를 그러한 이홍에게 물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측천은 자신이 공들여 닦아놓은 권력의 기반을 송두리째 아들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홍은 자기의 말을 잘 듣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이홍이 황제가 되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권력이냐? 자식이냐? 이 양자택일의 중대한 기로에 선 무측천은 비정하게도 자식을 버리고 권력을 택하였습니다. 675년(高宗 上元 2년) 무측천은 24살의 아들에게 독약을 먹여서 죽여 버렸습니다. 이홍이 죽은 후 고종은 원래 두통 증세가 있던데다 정신적 충격까지 받아 현실적으로 더 이상 정사를 계속 돌보기가 어려워 황위를 무측천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측천은 황위를 계승할 수 없었습니다.
이홍이 죽은지 한 달 후에 둘째 아들 이현이 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이현은 형 이홍에 못지 않을 정도로 총명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뛰어났습니다. 더욱이 재상들이 주변에서 그를 잘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측천은 다시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를 느꼈습니다. 결국 무측천은 다른 사람을 교사하여 태자가 여색을 탐한다고 모함하게 하였습니다. 680년 8월 이현은 태자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폐서인 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파주(巴州)로 추방되었습니다. 684년 무측천은 중종 이철을 폐위시킨 사흘 후에 파주로 사람을 보내어 이현을 죽였습니다.
이현이 폐서인 된 이튿날 셋째 아들 이철이 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683년 고종은 황위를 태자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로써 태자 이철이 황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중종(中宗)입니다. 중종은 그의 형들에 비해 아주 나약했기 때문에 무측천은 처음부터 순순히 그의 즉위를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종은 황제에 즉위한 후에 황태후가 된 무측천을 안중에 두지 않고 그녀의 역량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중종은 황후 위씨(韋氏)와 그 일족들을 총애하여 먼저 자기의 장인 위현정(韋玄貞)을 재상에 임명하였습니다. 고종이 임종시에 임명하였던 고명(顧命) 재상 배염(裵炎)이 동의하지 않자 중종은 안하무인격으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천하를 모두 그에게 주었는데 어쩌겠단 말이오?"
배염은 무측천에게 달려가서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무측천은 즉각 대신들을 건원전(乾元殿)에 소집하여 중종을 폐위시켜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한 다음 그를 궁궐 깊숙한 곳에 유폐시켰습니다. 중종을 유폐시킨 후 무측천은 자기의 막내 아들 이단(李旦), 즉 예종(睿宗)을 황제로 옹립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예종의 정사 참여를 배제한 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모든 대소사를 직접 관장하였습니다.
무측천은 먼저 낙양(洛陽)의 명칭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향후 새로운 왕국의 도읍으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왕조에서 사용하던 문무백관의 명칭도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즉 상서성(尙書省)은 문창대(文昌臺), 좌우복사(左右僕射)는 좌우승상(左右丞相), 문하성(門下省)은 난대(鸞臺), 시중(侍中)은 납언(納言), 중서성(中書省)은 봉각(鳳閣)으로 바꾸고, 상서성 소속의 6부(部)도 이부(吏部)는 천궁(天官), 호부(戶部)는 지관(地官), 예부(禮部)는 춘관(春官), 병부(兵部)는 하관(夏官), 형부(刑部)는 추관(秋官), 공부(工部)는 동관(冬官)으로 각각 그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쇄신의 단행은 모두 그녀가 황제에 오르기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모든 것이 그녀의 생각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녀의 의도를 미리 간파한 일부 대신들이 격렬한 반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684년 9월 무측천에 의해 경성에서 추방되었던 서경업(徐敬業)이 제일 먼저 반기를 들었습니다. 서경업은 양주(揚州)에서 군대를 일으켜 10여일만에 10만대군을 결성하였습니다. 이때 유명한 시인으로 초당사걸(初唐四杰)의 한 사람인 낙빈왕(駱賓王)이 무측천을 토벌하기 위한 격문을 썼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무측천은 그 격문을 보고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그러한 인재가 자신의 휘하에 없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무측천의 인재등용에 대한 넓은 포용력과 인재를 아끼는 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무측천은 이효일(李孝逸)에게 30만대군을 이끌고 서경업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했으며, 이에 서경업은 얼마 버티지를 못하고 난을 일으킨지 40여일만에 평정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서경업과 낙빈왕이 부하에게 피살됨으로써 무측천은 집권 후에 맞이한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서경업의 반란을 평정한 후에 무측천은 다시 내각을 개편하였습니다. 원래 재상이었던 배염이 자기를 배반하고 서경업에게 동조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무측천에게 정권을 예종에게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배염은 무측천에 의해 처형당하였습니다. 그후 무측천은 다른 재상들도 파면하고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각을 교체하였습니다.
순조롭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무측천은 미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형성해 나갔습니다. 예를 들면 그녀의 조카 무승사(武承嗣)는 사람을 시켜 '황제의 모친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니, 황제의 업적이 영원히 번성하리라(聖母臨人, 永昌帝業)'라는 글귀가 새겨진 흰돌을 낙수(洛水)에서 가져왔다고 하면서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것을 본 무측천은 매우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하였습니다.
당 고조 이연의 11번째 아들 이원가(李元嘉)의 반발이 있었지만 무측천은 즉시에 그것을 진압하고 황제의 등극을 향하여 순조로운 행보를 계속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녀의 권세에 도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690년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하여 무측천은 마침내 예종을 폐위하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습니다. 그리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준비해 둔 도읍지 낙양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에서는 이를 '무주(武周)'라 일컫습니다. 무측천이 황제에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였으니, 중국역사상 그녀는 황제에 즉위한 나이가 가장 많은 황제가 되었습니다.
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한 후에 수구세력의 반항을 저지하기 위하여 색원례(索元禮), 주흥(周興), 내준신(來俊臣) 등과 같은 악독한 관리를 임명하여 참혹한 형벌로써 수천명에 달하는 당왕조의 종실과 대신들을 주살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다지기 위해서 많은 인재를 등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과거제도는 위진(魏晋) 이래로 신분에 따라 관리를 임용하던 악습과 그로 인한 폐단을 타파하기 위하여 수(隋) 양제(煬帝) 시기에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나 무측천 시기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새로 임용된 관리들 중에는 미천한 집안의 출신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신분의 상승을 필요로 하였고 무측천은 그러한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로써 많은 문인학사들은 무측천의 지지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무측천은 수구세력을 타파하여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굳건히 다지는데 그들을 이용하였습니다.
새로운 인재들을 초빙하기 위하여 무측천은 한편으로는 낙양의 궁전에서 친히 공사(貢士: 과거시험에서 회시(會試)에 합격한 사람)의 과거시험을 주관함으로써 최초로 '전시(殿試: 과거제도 중 최고의 시험으로 궁전의 대전(大殿)에서 거행하며 황제가 친히 주관함)'제도를 정착시켰습니다. 그녀는 또 '무거(武擧)'를 설치하여 무예에 뛰어난 사람을 관리로 선발하였으며, 각급 관리와 백성들이 직접 천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서적을 편찬한다는 명분 하에 재능이 뛰어난 문인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조정을 위해서 정책을 마련하거나 상소문을 처리하게 하는 등 재상의 업무를 보좌토록 하고, 그들을 '북문학사(北門學士)'라 하였습니다. 그녀는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하나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새로운 인재의 발굴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고루 잘 등용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집권 시기에는 정관(貞觀: 627~649, 당 태종의 연호) 시기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궁궐에 인재가 가득하였습니다. 당시에 재상을 역임하였던 이소덕(李昭德), 소량사(蘇良嗣), 적인걸(狄仁杰), 요숭(姚嵩) 등은 모두 뛰어난 재상으로 청사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녀는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관리를 발견하기만 하면 즉각 그들의 직위를 강등하거나 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러한 사람들을 주살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측천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관리하는데도 매우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절대로 조정의 대권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딸 태평공주(太平公主)는 권모술수에 대단히 능하였습니다. 무측천은 그러한 태평공주를 엄격하게 지도하여 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항상 스스로 행동을 주의시켰습니다. 무측천은 태평공주에게는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딸로 나만큼 총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총기로 잘못을 저지르지는 마라."는 말을 남기도 하였습니다. 무측천의 조카 무승사(武承嗣)가 재상을 역임하고 있었던 692년 이소덕이 무측천에게 무승사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황위를 찬탈할 위험이 있으니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귀뜸을 하였습니다. 그후 무측천은 무승사를 재상에서 해임하였습니다. 이에 이소덕에게 원한을 품은 무승사는 무측천의 면전에서 이소덕을 무고하였으나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질책하였습니다.
"나는 이소덕을 임용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소. 그는 나의 고생을 덜어주고 있는데 그대가 어찌 그와 비교될 수 있겠는가!"
무측천이 총애하던 환관 설회의(薛懷義)가 권세를 등에 업고 거만하게 횡포를 일삼었지만 많은 고관대작들이 그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아첨을 다 떨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재상만 출입할 수 있는 남아(南牙)라는 곳에 들어갔다가 재상 소량사에게 들켰습니다. 소량사는 부하들에게 명하여 그를 끌어내어서 따귀를 몇 십대 치게 했습니다. 설회의는 곧장 무측천에게 달려가서 자신의 억울함을 울면서 호소했으나 무측천은 오히려 그를 꾸짖었습니다.
"남아(南牙)는 재상이 출입하는 곳이니 너는 마땅히 북문(北門)으로 갔어야 했어."
무측천은 만년에 이르러 황위를 자기의 조카 무승사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지만 재상 적인걸(狄仁杰) 등의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황위를 조카 무승사에게 물려주어 무씨 정권을 계속 유지시킬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아들(중종 이철과 예종 이단)에게 물려주어 다시 당왕조의 황태후로 돌아갈 것인지, 무측천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미 74세의 고령이었던 무측천은 적인걸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내가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큰 앵무새의 양날개가 잘려져 있더군요. 경이 보기에는 이것이 무슨 징조인 것 같소?"
그러자 적인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측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의 성씨가 '무'씨이니 그 앵'무'새는 바로 폐하이시고, 양날개는 바로 폐하의 두 자제분이십니다. 만약 폐하께서 다시 두 자제분을 기용하신다면 양날개는 새롭게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699년 무측천은 유폐시켰던 자신의 셋째 아들 중종 이철(즉 이현(李顯))을 다시 불러 황태자로 삼았으며, 당시의 태자였던 예종 이단은 현명하게 태자를 형에게 양보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무승사는 자신의 계승권이 단숨에 날아가 버린 것을 알고 격분해 하다가 결국 화병으로 죽었습니다.

705년 정월 무측천은 이미 82세의 고령에다 병까지 겹쳐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재상 장간지(張柬之) 등이 문무대신들을 거느리고 궁궐로 진입하여 무측천의 환관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등을 죽이고 중종(中宗)을 황제로 옹립한 후 '당(唐)'이라는 국호와 당왕조를 복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종은 무측천을 그대로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 일컬으면서 존대하였습니다. 그해 11월 무측천의 병세가 위독하여 중종이 병문안을 갔습니다. 이에 무측천은 중종에게 무씨(武氏) 집안을 잘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한 후,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82년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모두 다 했으니 더 이상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지난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꿈만 같구려. 차후에 나를 꼭 황제라 칭하지는 말고 여전히 태후라 칭하여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불러주시오."
그리고는 다시 중종에게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씨의 일가 역시 사면 복권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측천의 명칭을 당(唐) 현종(玄宗)이 즉위한 후 '측천황후(則天皇后)'라 하였으니 그녀의 유언은 비교적 객관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05년 11월 2일 상양궁(上陽宮) 선거전(仙居殿)에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측천은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평가할 때 양극단으로 엇갈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일까? 어째서 그러한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죽기 전에 자기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무측천의 묘비는 이례적으로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706년 정월에 무측천의 영구는 장안으로 운송되어 그녀의 유언에 따라 고종의 무덤인 건릉(乾陵, 지금의 서안시 서북쪽 건현(乾縣) 양산(梁山)에 있음)에 합장되었습니다. 무측천이 죽은 후 그녀의 휘호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후손들의 존경심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중종이 죽은 후 다시 황위에 오른 무측천의 막내 아들 예종 이단은 그녀의 존호를 '천후(天后)'라 하였다가 다시 '대성천후(大聖天后)', '천후황제(天后皇帝)', '성후(聖后)'라 하였습니다. 749년에 이르러 무측천의 휘호를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로 확정하였습니다.
무측천은 약 반세기 가량 국정을 다스리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특히 농경장려, 인재중용, 측근단속 등의 조치를 취하여 당시의 사회를 효과적으로 안정시키고, '정관지치(貞觀之治)'의 발판을 공고히 다져서 경제를 윤택하게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녀는 잔혹한 살상과 천륜을 위배하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역사상 그 정치적 공헌을 인정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녀는 불교 장려의 일환으로 대단위 사원 공사를 벌여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어떤 학자들은 무측천이 재위 시절에 자신의 정적 제거와 불교 사원 건축에 대부분의 정력을 쏟아부어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지연을 초래했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기도 합니다.
글출처: 두산대백과사전
# by | 2007/03/11 07:25 | 잡상잡필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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