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문화·유적

- 대적광전 구역

교를 지탱하는 3대 기둥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 그리고 그 가르침을 전하는 승려입니다. 이를 불법승(佛法僧), 즉 삼보(三寶)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3대 사찰을 말할 때, 불보 사찰인 통도사, 법보 사찰인 해인사, 승보 사찰인 송광사,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불교의 경전의 집합체인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어 불보 사찰로 불리는 해인사(海印寺)는 신라시대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졌습니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의 이름도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海) 속에서 비치는(印) 경지를 말합니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래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입니다.

- 쌍둥이 비로자나불. 이 불상은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목불(木佛)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스님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802년) 10월 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절을 창건하였고, 대를 넘겨 이정화상(理貞和尙)에 의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후 해인사는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쓴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년)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하고 나서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해인사 중수에 관한 기록으로 '균여전'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대가로 경중봉사(敬重奉事)하여 전지(田地) 500결(結)을 시사(施事)하고 옛 사우(寺宇)를 중신(重新)하였다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 고려 태조 때 해인사는 창건 이후 희랑대사에 의해 확장되고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때가 바로 930년 경이였습니다.

- 삼층석탑과 석등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2년(1393)에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리는 삼층석탑을 수리하였습니다. 해인사는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중수하였는데, 이는 조선 왕실이 해인사에 힘을 기울인 결과라 생각됩니다. 특히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되었습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세조 3년(1458년)에 임금이 죽헌(竹軒)에게 명하여 대장경 50벌을 인경(印經)하고, 신미(信眉), 학조(學祖) 두 스님에게 장경판전을 시찰하게 하여 그 결과 보고에 따라 판고가 비좁고 허술하므로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판전 40칸을 다시 짓게 하였다고 합니다.

해인사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시기는 대체로 성종 12년(1481년)에서 21년(1490년) 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성종 19년(1488년) 덕종의 비 인수(仁粹) 왕대비와 예종의 계비 인혜(仁惠) 왕대비가 세조비 정희왕후의 유명을 받들어 도목수 박중석(朴仲石) 등을 보내어 학조(學祖)대사로 하여금 판전 30칸을 짓게 하고 보안당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1490년까지 많은 전각과 요사 등 160여 칸을 완성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종 22년(1491년) 조위(曺偉)가 쓴 '해인사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았던 해인사는 1695년부터 1871년까지 무려 일곱 차례나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번 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그 가운데 1817년의 대화재로 말미암아 천여 칸의 건물이 불탔습니다만, 그나마 다행인게 팔만대장경판은 무사하였습니다.

- 독성각(獨聖閣). 독성각은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신 당우로, 나반존자는 나한(羅漢) 중의 한 사람으로 스승 없이 자기 힘만으로 모든 진리를 깨친 성자(聖者)입니다.

해인사의 대웅전인 대적광전은 1817년 대화재 후 건립됐습니다. 이 대적광전에서 발견된 상량문은 건립 당시 건물의 화재와 재난을 막기 위해 정성이 담긴 글을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가 써서 상량에 봉안한 것인데, 그 때문인지 단 한 번도 화재가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추사의 이 상량문은 지난 1961년 기와와 지붕을 수리하면서 들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해인사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팔만대장경판입니다. 따라서 해인사 가장 깊숙한 곳에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판고가 있습니다. 팔만대장경판은 1236년에 몽고족의 침입을 받았을 때 고려 왕실이 강화도에서 새긴 것입니다. 자작나무를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꺼내 판을 만들고, 다시 소금물에 삶은 뒤 그늘에서 말리고 대패질해 만들었습니다. 그 정성이 놀랍고, 그 규모가 놀랍습니다. 목판으로 8만1340판이고, 책으로 묶으면 6791권이 됩니다. 그 책을 읽기도 쉽지 않은데 새긴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더욱이 글자를 한자 새기고 나서 절 한 번 했다는데 신앙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 묘길상탑

일주문 못미처 사적비, 송덕비, 이런저런 스님들의 부도비가 이리저리 늘어선 해인사 비석거리. 그 한옆에 있는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묘길상탑입니다.

이 탑은 전체 높이 3미터쯤 크기의 전형적인 신라 탑으로, 다른 탑과는 달리 불사리를 안치한 예사 탑이 아니라 일종의 전몰장병 위령탑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진성여왕 9년(895년) 7월에 세워진 이 탑은 전란에 사망한 승려와 일반인 원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 일주문. 해강 김규진이 '伽倻山海印寺(가야산해인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당간지주. 당간지주의 안쪽 면에 '나무아미타불', '南無阿彌拖佛'이라고 한글과 한자로 씌어 있습니다.

- 고사목. 일주문을 들어서면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 있는데, 그 가운데는 수명을 다한 고목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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