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묘의 12지신상 문화·유적

- 김유신 묘


릴 적 초등학교 때 당시에는 수학여행을 대부분 경주로 갔었습니다. 비록 몇십 년의 세월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계림, 태종무열왕릉, 그리고 김유신 묘를 갔었던 기억이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습니다.

김유신 묘는
송화산(松花山)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경주 시내에서 영천으로 난 4번 국도를 따라 고속버스터미널 옆 서천교를 건너 사거리에서 오른편 송화산 쪽으로 1.2km 정도 가는 곳에 있습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불과 2k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데다, 형산강을 끼고 경주시를 바라보며 찾아가는 길 맛도 좋아 한 번쯤은 찾아갈 만한 곳입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국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 일명 김구형(金仇衡))의 증손이며, 신라의 명장이었던 서현(舒玄)의 아들로 태어나 15살에 화랑이 되어 무예를 닦고, 35살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김춘추가 왕이 될 수 있게 도왔고,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에 나서 무열왕 7년(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 총대장이 되어 계백 장군이 거느린 백제군을 황산벌에서 무찔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또한 문무왕 8년(668년) 고구려를 공략할 때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이어서 삼국의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 군사도 물리침으로써 명실상부한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문무왕으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신라 최고의 지위를 받았고, 뒷날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유신이 아무리 당대의 명장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렇듯 왕릉을 능가하는 호화스러운 묘를 과연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국유사>에 "김유신이 죽은 뒤 흥무대왕으로 봉하였으며, 그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를 동향한 산봉에 있다."고 한 반면에,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그의 부음을 듣고 채백(彩帛) 1천 필과 조(租) 2천 석을 보내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인을 보내 금산원(金山原)에 예장하고, 유사(有司)로 하여 금 비를 세워 기공(紀功)을 기명하고, 민호(民戶)를 배정하여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라고 서로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유신이 죽은 뒤 비록 문무왕에겐 외삼촌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처럼 호화스럽게 묘를 마련해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호석(護石) 중간마다 있는 평복차림에 무기를 든 12지신상(十二支神像) 가운데 용, 뱀, 말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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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지신상 가운데 양, 원숭이, 닭의 상.
- 12지신상 가운데 개, 돼지, 쥐의 상.
- 12지신상 가운데 소, 호랑이, 토끼의 상.

김유신 묘는 직경 30m나 되는 큰 무덤으로, 봉분 아래에는 병풍처럼 판석으로 호석(護石)을 설치하였고, 호석 중간마다 평복 차림에 무기를 든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호석의 밖으로는 여러 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돌렸습니다. 한편 호석의 12지신상과는 별도로 묘의 주변에 땅을 파고 묻어 두었던 높이 약 30cm의 납석에 정교하게 새긴 12지신상이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김유신 묘에서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12지신상입니다.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등 열두 동물을 새긴 조각상들 중 일부는 지금도 살아있는 듯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대개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갑옷을 입은 조각상들이 새겨지는데 김유신 묘의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습니다. 몸체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머리 모습이 이색적이며, 무장을 하지 않아 그런지 매우 온화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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