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부분 사라져 버리고 남아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는 옛 절터를 굳이 찾아나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텅 빈 가운데 느낄 수 있는 적적함이 좋아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봉림사터는 더 없이 훌륭한 옛 절터입니다.
봉림사터에는 옛 봉림사를 떠올릴 수 있는 흔적들이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나마 이곳이 한때나마 절터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는 안내판과 표지석 따위만 있을 뿐, 옛 봉림사를 떠올리게 해주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직 무성한 억새만이 무심하게 철 따라 피었다가 지곤 합니다.

봉림사터는 창원골프장 부근 봉림산 품 속에 있는데, 창원시 봉림동 마을을 지나 산 속으로 제법 올라가야 있습니다. 하지만 봉림사터 부근까지 차 한 대 정도 지나갈 수 있는 시멘트로 포장된 산길이 나 있고, 가는 길 곳곳에 안내판도 붙어 있어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폐허로 변해버렸지만, 봉림사(鳳林寺)는 선종의 구산선문(희양산문, 가지산문, 동리산문, 성주산문, 사굴산문, 사자산문, 실상산문, 수미산문, 봉림산문) 중 하나였습니다.

봉림사터에 도달하려면 시멘트 산길 옆 공터에 차를 세워두고 300미터쯤 숲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호젓한 오솔길인 이 산길 양옆엔 푸른 대나무로 가득 차 있어 겨울철임에도 녹음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봉림사터는 풍수지리적으로 말할 때 '봉황이 둥지에서 알을 품는 형국(鳳巢抱卵形)'이라고 합니다.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들며, 대나무 열매를 먹고산다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봉림사터로 가는 산길이 온통 푸르게 군락을 짓고 있는 대나무 숲으로 무성한 이유를 말입니다. 또한 절 아래 마을엔 예로부터 벽오동 숲이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고 하니, 이 또한 봉황이 마을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주민들의 바람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봉림사는 통일신라시대 진경대사 심희(眞鏡大師 審希, 854년~923년) 스님이 진례성 제군사 김율희의 협력으로 894년께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파를 형성하였으며, 심희 스님과 제자인 찬유(璨幽) 스님 등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쳤습니다. 봉림사는 신라 민애왕에서 고려 광종 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들의 귀의를 받은 대찰로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봉림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이곳에 있었던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의 비문 내용을 통해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심희 스님은 868년에 혜목산 고달사에 주석하고 있던 원감국사(圓鑑國師) 현욱(玄昱, 787년~869년) 스님에게 계를 받았습니다. 19세 이후로 명산과 절경을 탐방하였으며, 34∼44세 때에는 송계(松溪)와 설악산 등지에서 참선하였습니다. 그 뒤 난리를 피하여 명주(溟州)의 산사에서 머물다 김해의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내려왔습니다. 이렇게 김해 진례(進禮)에 온 심희 스님은 이곳 호족인 김율희의 도움으로 옛터를 보수하고 봉림사를 일으켰습니다.

183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봉림사는 고려 광종 이후 쇠퇴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봉림사터는 임진왜란 이후 내내 버려진 절터로 잊혔다고 합니다.
그러다 1919년 일제에 의해 이곳에 있던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과 부도비(보물 제363호)가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며, 그나마 이곳에 남아있던 삼층석탑도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창원시 상북초등학교 운동장 옆 뜰에 있습니다.

봉림사의 폐사에 대해 입으로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는 183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의 기록과는 사뭇 다릅니다.
조선시대에 밀양에 사는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여주 이씨들이 봉림사터가 명당임을 알고 묘를 쓰려 하였으나 이곳 승려들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시신이 들어 있지 않은 상여 3개를 만들어서 가로막는 승려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 그 틈에 시신이 들어 있는 상여를 몰래 운반하여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합니다. 그 뒤 절은 폐허가 되었고, 여기에 묘를 썼던 여주 이씨의 가문도 역시 망했다고 하니, 그때가 약 200년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풍수지리학자인 최원석 선생은 그의 글에서 "(중략) 천시(天時)에는 어쩔 수 없듯 조선시대에 들어서 봉림사는 폐찰되고 말았다. 그 연유는 임란 때 왜적의 침입과 조선왕조의 억불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경내에 버젓이 있는 사묘(私墓)는 어인 영문인가? 명당으로 알려진 폐사지에 묘가 들어서지 않은 사례가 별로 없지만, 봉림사터의 경우 의도적으로 봉황의 혈이 맺는 통로인 부리 부분에 묘를 들여놓았다. 그 주인공은 전라좌수사를 지낸 이모(李謀)라고 한다. 그러나 기대했던 부귀영달은커녕 그들은 파문되고 말았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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