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ure from Emptiness

hanulh.egloos.com

마이가든 포토로그



2009/04/18 07:38

영천 청제비(菁堤碑) 문화유적

- 영천 청제비


천시 도남동 도남농공단지 뒤편 구석에 경부고속도로로 말미암아 두 동강이가 난 저수지가 하나 있습니다.

'청못'으로 불리는 이 저수지는 그냥 보아선 그저 평범한 못에 불과해 보이지만, 1,470여 년 전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못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청제비 비각


이 저수지 곁에는 붉은 창살로 사방을 둘러친 비각이 있고, 그 속에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영천 청제비(菁堤碑)와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입니다.

문화재청의 기록에 따르면 청제비는 신라 법흥왕 23년(536년)에 청못을 처음 축조한 기념으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청제비는 1968년 한국일보사 주관한 신라삼산학술조사단(新羅三山學術調査團)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신라 수리시설의 실태와 신라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 청제비 정원명
. 무분별한 탁본으로 말미암아 먹물이 묻어 시커멓게 보입니다.

청제비의 전체적인 모습은 화강암의 자연 판석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비의 양면에는 각기 시대가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습니다.

'병진년
(丙辰年)'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처음 축조할 때 새긴 것이고, 반대 면의 '정원14년(貞元十四年)'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새로 수리할 때 새긴 것입니다.
-
청제비 정원명 글씨

고졸한 글씨체로 쓰인 비문의 내용은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의 명칭, 공사의 규모, 동원된 인원 수, 청못의 면적, 청못으로 인해 혜택받을 수 있는 농지 면적, 공사를 담당한 인물의 이름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문이 쓰여진 연대는 '병진'이라는 간지로 보아 536년(법흥왕 23년)으로 추정됩니다.

'정원14년'으로 시작되는 비문의 내용은 청못의 수리가 완료된 연월일, 비문의 표제, 수리하게 된 경위, 수리한 둑의 규모, 수리 기간, 공사에 동원된 인원 수, 관계 담당관의 이름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원 14년이라는 절대 연대로 보아 비문이 쓰여진 연대는 798년(원성왕 14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청제비 병진명

이처럼 비문은 신라시대 벼농사와 수리시설, 공사규모, 당시의 관직명, 인명 등을 이두문으로 기록하고 있어, 신라시대의 사회, 정치사와 언어연구에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학계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 청제중립비
(菁堤重立碑)

청제비 옆에 선 청제중립비는 숙종 14년(1688년)에 세워진 것으로 청제비와 1천 년 이상의 시간적 틈이 있습니다. 원래 청제비에서 서쪽으로 5m 떨어져 있던 것을 지금은 청제비와 나란히 비각 안에 서 있습니다.

청제중립비는 절단되어 흙속에 묻혀 있던 청제비를 다시 세우고 그 사연을 새겨 1688년에 세운 비입니다. 지붕돌이 없이 윗부분의 좌우를 귀접이하여 그 모양이 이른바 규형 비석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중엽부터 조선시대까지 유행했던 것입니다.

- 영천 청못
. 못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경부고속도로가 멀리 보입니다.

청못은 우리나라 농업수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으로 제방의 길이가 약 240m, 그 높이는 12.5m에 둘레는 2km쯤 됩니다. 저수면적은 11만 제곱미터고 저수량은 약 59만 톤 정도입니다. 현재는 못 가운데로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 못이 두 동강이가 나버렸습니다.

이 못은 관개면적은 134ha에 달해 지금도 중요한 용수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청못 아래로 펼쳐진 30만 평에 이르는 구암들은 요즈음도 좀처럼 가뭄을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p.s.)

청제비 비명 상세내용

① 병진명

▼ 병진명 판독문

청제비의 앞면인 병진명은 17관등의 표기에 제(第)와 같은 표현이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하여 536년(법흥왕 23)으로 추정하고 있다. 글자는 10행으로 전부 107자 정도라고 추정되며, 마모의 정도가 심하여 다수의 글자를 제대로 판독할 수 없다.

그 내용을 보면
1행에는 청제를 만든 날짜와 청제의 이름을 적은 부분으로 병진년 2월8일을 공사의 시작일을 표시하였다.
2행 첫 번째 글자 오(塢)는 청제 즉 청못을 뜻한다.
2행 두 번째 글자에서부터 4행 끝부분까지는 청제의 규모와 동원인원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학자간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경주대 김창호 교수는 2행 두 번째 글자부터 3행 여덟 번째 글자까지가 청제의 각 부분의 길이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3행 아홉 번째 글자부터 4행 끝부분까지는 동원인원을 알 수 있다. 우선 칠천인(七千人)으로 보아 공사에 동원된 인원은 7,000명인걸 알 수 있다. 작인(作人)은 청못을 만드는 사람으로 쓰인거 같다. 4행 마지막의 이백팔십방(二百八十方)은 280개의 지역을 뜻한다. 7,000명의 인원을 280개의 지역에서 각 25명씩 뽑았음을 의미한다.
5행부터는 판독이 힘들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사인(使人-시키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대사제(大舍第) 대오제(大烏第) 소사제(小舍第) 소오제(小烏第) 등 관등명칭과 사람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청제를 축조할 당시에 책임자의 이름이 아닐까 한다.

병진명 해석> 법흥왕 23년 536년 병진년에 280개의 지역에서 25명씩을 뽑아 전체로 7,000명을 동원하여 2월 8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② 정원명

▼정원명 판독문

청제비 뒷면에 있는 정원명은 법흥왕 23년(536)에 축조된 저수지가 파손되었으므로 그를 수치(修治)하기 위하여 역역을 동원한 내용과 수치된 저수지의 규모를 나타내고 있다.

- 1행에서 2행 세 번째 글자
정원십사년무인사월십삼일청제 치기지(貞元十四年戊寅四月十三日菁堤 治記之)
: 정원14년 4월 13일에 청제를 수리하고 그 내용을 기록한다고 되어있다. 처음에 정원14년이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정원은 당 덕종의 연호로서 연도는 798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리를 하고 내용을 기록한다는 것으로 보아 4월 13일날 수리를 마쳤음을 의미한다.
-2행 네 번째 글자부터 3행 다섯 번째 글자
위보제상고소내사 이견령사의(謂洑堤傷故所內使 以見令賜矣)
: 관직명을 뜻하고 그 내용은 못둑이 상하였으므로 소내사에게 살펴보게 하는 내용이다.
-3행 여섯번째 글자부터 5행 세번째 글자
구장삼오보(玖長三五步) 안립홍지심륙보삼척(岸立弘至深六步三尺) 상배굴리십이보(上排掘里十二步)
: 수치의 규모에 대한 기록이다. 구장 35보, 안립홍지심 6보3척, 상배굴리 12보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구장은 못둑 길이를 의미하며 안립홍지심은 못둑에서 가장 깊은 곳을 의미하고 상배굴리는 배수관까지의 길이를 의미한다.
-5행 네 번째 글자부터 6행 여덟 번째 글자
차여위이월십이일원사월십삼일(此如爲二月十二日元四月十三日) 차간중료치내지(此間中了治內之)
: 공사기간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해보면 “이와 같이 하기를 2월 12일날 시작하여 4월 13일에 이르는 동안 수치 하였다” 는 뜻이 된다. 이는 두 달 동안 청못을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6행 아홉 번째 글자부터 9행까지 글자
도합부척백삼륙(都合斧尺百三六) 법부만사천백십인(法巭万四千百十人)
차중전각조역절화압(此中典角助役切火押) 이군각(二郡各) □인이기사내지(□人尒起使內之)
: 공사에 동원된 인원의 수에 대한 기록이다. 우선 부척(斧尺)은 도끼를 사용하는 기술자 이며 법공부(法功巭)는 국가에 소속된 일꾼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율각조역은 전율각은 확실하지 않으나 조역은 잡역부를 의미한다. 이를 토대로 해석해보면 “ 합하여서 부척(斧尺)이 136명이고 법공부(法功巭)가 14,140명이며 절화<지금의 영천>과 압탁<영천과 밀접한 압량이라는 지역> 두 고을에서 각각 □명이 동원되었다.” 는 뜻이 된다.
-10행 첫 번째 글자부터 2행 끝까지
절소내사상간년□(節所內使上干年□) 사수대사(史須大舍) □수수옥순□(□守須玉純□)
: 공사의 책임자에 대한 기록이다. 절(節)은 지휘하다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해석해 보면 “지휘한 소내사는 상간년
, 사수 대사, 수수 옥순이다.”는 뜻이 된다.

※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은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가 청못을 축조할 때 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는 것이다. 병진년에 축조를 할 당시에 7,000명에 불과한 데 수리를 하는 데는 14,140명이 동원된 것이다. 이는 청제의 수리는 빈민구제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유난히 재해가 많아 이에 국가에서 2월~4월에 이르는 보리고개 시기에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청못을 수리한 게 아닌가 한다.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hanulh.egloos.com/tb/4311037 [도움말]

덧글

덧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