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의 영화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는 못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든 영화는 그가 살아온 과정만큼이나 대개 무겁고 칙칙합니다. 그의 영화에 한결같이 흐르는 것은 새디즘을 동반한 선정성, 폭력과 공포로 얼룩진 폐쇄공간 속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강박증의 시네아티스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로만 폴란스키는 1933년 파리에서 유태계 폴란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폴란드에서 살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나치 수용소에 끌려간 그의 부모 가운데 어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었고, 겨우 살아남은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영화에 뜻을 두어 폴란드의 로츠 영화학교에서 영화공부를 하였으며, 그가 만든 당시의 단편 습작들은 이후 로만 폴란스키 영화의 방향을 짐작게 해줍니다.

그는 1962년에 <물속의 칼 Noz w wodzie>이라는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폴란드 내에서는 혹평을 받았지만, 베니스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받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영화는 폐쇄공간, 폭력, 선정성이라는 그의 일관된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베니스 영화제 수상을 계기로 파리에 정착하였고, 심리 공포물인 <반격 Repulsion>(1965년 작)과 <막다른 골목 Cul-de-sac>(1966년 작)을 완성하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막다른 골목>은 고립된 성에서 마피아의 방문을 받는 커플의 이야기로, 이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수상작이자 로만 폴란스키 감독 자신이 꼽은 최고의 걸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로만 폴란스키를 대표하는 영화는 뭐라 해도 역시 1974년에 만든 <차이나타운>입니다. 잭 니콜슨과 훼이 더너웨이가 주연을 맡았죠.
1930~40년대 미국의 필름 느와르에서 형식을 빌어온 이 영화는 미국 내에서 그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아직껏 그의 영화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이 영화만 가지고도 이미 우리 시대 중요한 영화감독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런 로만 폴란스키를 소재로 한 영화가 작년에 개봉되었습니다. <로만 폴란스키: 원티드 앤 디자이어드(Roman Polanski: Wanted and Desired)>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미국에서는 수배(wanted) 중이고, 프랑스에서는 환대(desired)받는다는 의미를 지녔죠. 영화는 마리나 제노비치(Marina Zenovich)라는 여성감독이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의 최대 스캔들이라고도 할만한, 그로서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과도 같은 일을 소재로 하였습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로만 폴란스키가 13살 소녀와 성관계를 가진 혐의로 기소된 사건입니다.
1977년 멀홀랜드의 잭 니콜슨 저택에서 그는 <보그> 화보촬영을 온 13살의 사만다 게일리를 만나 최음제가 섞인 샴페인을 먹이고, 그녀의 의사에 반한 성관계를 맺었습니다. 그 결과 로만 폴란스키는 최고 50년까지 옥살이가 가능한 '미성년자 성관계'형을 선고받았고, 그는 범죄자 인도협정이 적용되지 않는 프랑스로 도피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로만 폴란스키는 미국에 다시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당시 판사와 검사 간의 위법행위와 부적절한 단합이 있었음을 보여주면서, 오로지 판사와 검사, 그리고 변호사 간의 의견 절충으로 판결이 결정되는 사법체계에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당시 피해자였던 사만다 게일리 측조차도 로만 폴란스키에 대해 실형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상업주의 언론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했던 당시 담당판사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로만 폴란스키는 형벌 아닌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사족이지만 덧붙입니다.
폴란스키가 미성년자 강간사건으로 프랑스로 도피하게 된 상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건 당시 폴란스키는 대중언론과의 관계가 불편한 상태였습니다. 그 배경으로 몇 가지 가능성을 들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미국 주류사회에서 얕잡아 보는 폴란드 출신입니다. 더구나 외모 또한 키도 작고 그다지 볼품이 없습니다. 여자관계 등 문란한 사생활 또한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올랐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미국 영화계에서 젊은 나이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습니다.
자…, 가싶꺼리를 좋아하는 대중의 취향을 충실히 반영하는 대중언론이 그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일 요건은 제대로 갖추어진 셈입니다.
미국 대중언론과 폴란스키가 틀어진 결정적 계기는 그의 부인 샤론 테이트의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샤론 테이트를 <용감한 뱀파이어 킬러>(한국에선 박쥐성의 무도회로 개봉)에서 만나, 그들은 1968년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폴란스키의 바쁜 일정 탓에 이들은 서로 떨어져 있게 되었지만, 항상 전화로 사랑을 확인할 만큼 각별한 애정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폴란스키가 <악마의 씨>를 찍은 다음해인 1969년, 악명 높은 살인광 찰스 맨슨과 그를 추종하는 집단들에 의해 샤론 테이트는 로스앤젤레스 저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살해 당시 그녀는 임신 8개월이었으며, 살인범들은 임신한 배를 갈라 죽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샤론 테이트의 죽음을 두고 일부 대중언론에선 흥미 위주로 폴란스키의 책임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폴란스키가 이에 대해 발끈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 일로 신문 기자들에 대해 깊은 불신이 쌓였습니다. 그러니 그와 미국 대중언론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될 리가 없었겠지요.
폴란스키가 어릴 때, 어머니는 나치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했고 아버지 또한 나치수용소에 감금되어 혼자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런 어린 시절의 악몽이 그의 삶 내내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유달리 파티나 여자를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 그가 겪었던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과 보상의 의미로 말입니다.
그런 폴란스키에게 그의 부인 샤론 테이트의 잔혹한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샤론 테이트와의 짧은 결혼생활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던 그였기에 이런 슬픔을 잊고자 약물과 술, 그리고 여자에 더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77년 잭 니콜슨 저택에서 미성년자 강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향해 발톱을 갈고 있던 대중언론에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 생겼습니다. 더구나 이 사건을 담당한 판사는 대중언론에 노출되길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중언론에겐 같이 장단을 맞출 수 있는 우군까지 생겼습니다. 폴란스키는 대중언론과 판사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들은 폴란스키가 저지른 행동에 대한 합당한 처벌보다는 그에게 최대한 창피를 주어 몰락시키는 게 더 우선인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이는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떠올려 보시면 대략적인 상황이 짐작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되어 그들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한 폴란스키는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태그 : 로만폴란스키




덧글
2009/06/18 17:49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