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21 09:35

일연 스님이 머문 곳을 찾아서... 문화유적

- 일연 스님이 돌아가신 인각사에는 지금 스님의 부도만이 쓸쓸히 남아 그를 기억하게 할 뿐입니다.


연 스님(1206년~1289년)은 당대에 존경받았던 뛰어난 고승일뿐만 아니라 우리 고대사 연구에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사료인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일연 스님은 1206년 경북 경산시 압량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성은 김(金)씨이고, 본명은 견명(見明)이며, 자는 처음엔 회연(晦然)이었으나 뒤에 일연(一然)으로 고쳤습니다. 어머니 이씨가 3일간 해가 집안으로 들어와 배를 비추는 꿈을 꾼 후 태기를 얻고 그를 낳다고 합니다. 아홉 살 때에 당시로써는 엄청나게 먼 길이었을 전라도 해양(海陽), 지금의 광주에 있는 무등산의 무량사(無量寺)를 찾아가서 글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었고, 가끔 가부좌를 하고 밤을 새우는 일도 있어 사람들이 기특하게 생각하였습니다. 5년 후 14세 때에 가지산문을 일으킨 도의 선사가 세운 진전사로 가 삭발하고 구족계를 받았으며, 선종에 속하는 여러 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공부하는 동안에 그의 평판은 날로 높아졌습니다.

1227년(고종 14년) 겨울에 승과에 나가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 22세였습니다. 이후 그는 여러 절을 두루 거치며 수도 생활을 하였고, 그 깨달음의 폭과 깊이를 더해 갔습니다. 그가 주관하는 법회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그의 설법을 듣고 감동을 받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삼중대사, 대선사 등에 올랐으며, 1283년에 국사가 되었습니다.

1289년(충렬왕 15년) 6월 일연 스님 나이 여든넷이 되던 때 인각사에 머물던 스님은 병을 얻자 회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7월 7일 손수 왕에게 올릴 글을 썼습니다. 이날 밤에 둘레가 한 자가 넘는 큰 별이 절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여러 스님들과 함께 선문답을 나누고 나서, "여러 선덕은 날마다 이것에 답하시오. 심하게 아프고 가려운 것과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은 것이 모호하여 가릴 수 없으리라."라는 말을 마치고, 문득 자리에서 내려가 방으로 들어가 다시 작은 선상에 앉아 조용히 멸적하였습니다. 이때 오색의 빛이 방 뒤로 일어서더니 타오르는 듯했고, 그 위로는 흰 구름이 마치 지붕처럼 덮었고, 하늘을 가리키고 가는 스님의 얼굴 모습은 선명하여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일연 스님은 사람됨이 과묵하여 허튼 말을 하지 않았고, 모든 일에 가식 없이 진정으로 대했으며,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문을 하는데서도 특별한 스승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덕을 닦으며 수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항상 곁에 머무르기를 원했습니다.

일연 스님이 우리들에게 남긴 것은 그가 이룬 불교적인 업적과 발행한 저서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일연 스님이 쓴 책은 모두 100여 권이나 된다고 하니, 가히 그 정력과 박식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와 관련 있는 불교서적은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두 권을 제외하곤 전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평생의 노작인 <삼국유사>가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와 천만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며, 그가 살았던 고려 중엽까지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책에는 신라시대의 향가 14수가 실려있는데, 이 향가는 <균여전>에 전하는 11수 외엔 현재까지 전하는 유일한 향가이기도 합니다.

- 오어사 입구
현판

일연 스님은 승과에 합격한 후 강원도를 떠나 포산, 지금의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의 비슬산으로 거처를 옮겨 22년간 지냈습니다. 그러다 44세가 되던 해인 1249년에 상국 정안이 남해에 있는 그의 개인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정림사라 하고, 일연 스님을 청함에 그곳에 주석하게 되었습니다.

마흔넷에 시작한 남해 생활은 쉰여섯 그러니까 1261년 왕명을 받고 강화도로 가기까지 12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고려 조정의 부름을 받고 남해 정림사로부터 강화도로 올라간 후 삼 년간 체류한 후 남쪽으로 다시 내려와 처음으로 머문 곳이 오어사입니다.
지금 오어사에는 일연 스님을 떠올려 주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일연 스님은 어떤 인연으로 이곳에 내려왔을까요?

- 오어사 대웅전
의 모습으로, 대웅전 뒤편 언덕에 지붕만 간신히 보이는 건물이 자장암입니다.

지금은 '철의 도시'로 변해 어엿한 대도시가 된 포항이지만, 당시 이곳은 개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있는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오어사는 포항의 변두리 지역인 오천에서도 제법 들어간 곳에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연 스님이 머물렀던 당시 오어사는 깊고 깊은 산골짜기 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어사에는 혜공 스님과 원효 스님의 설화가 전합니다. 오어사란 절 이름도 그 설화에서 유래하였고요. 이런 오어사에 일연 스님이 한때 머물렀습니다.
원효 스님과는 같은 고향 출신이란 인연도 없지 않았겠지만 일생의 스승이었던 원효 스님의 발자취가 깃든 이곳에 일연 스님이 머문 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입니다.
- 인흥사터 석탑


오어사에 얼마간 머물던 일연 스님이 인흥사 주지 만회가 주석을 일연 스님에게 양보하여 거처를 인흥사로 옮겼습니다. 인흥사는 일연 스님이 11년간 주지로 있으면서, 삼국유사의 뼈대에 해당하는 역대연표(歷代年表)와 불경까지 편찬하였습니다.

이곳은 지금 대구시 달성군에 속해 있으며,
인흥마을이라고 부르는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로 더 잘 알려진 곳입니다. 우리는 인흥마을이란 이름에서도 인흥사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인흥사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일부만 남은 석재를 이리저리 대충 맞추어 놓은 석탑 하나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 운문사 대웅보전(비로전) 앞에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을 따른 쌍탑이 서 있습니다.


인흥사에 머물던 일연 스님은 일흔두 살 되던 해에 왕명을 받들어 운문사로 거처를 옮겨 네 해를 머물렀습니다. 당시 운문사는 지금처럼 비구니 사찰이 아니었습니다. 이 절은 신라 진평왕 21년(460년)에 창건하여 대작갑사라 부르던 절로, 신라의 원광 법사가 세속오계를 전수한 곳이기도 합니다. 운문사란 절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리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곳 운문사에서 일연 스님은 본격적인 <삼국유사>의 집필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충렬왕 7년 일연 스님 나이 76세 때 몽고의 동정(東征)을 지원하기 위해 왕이 개성을 떠나 경주에 행재소(行在所)를 차리게 되자, 일연 스님은 경주로 불려가 일 년 남짓 머물렀습니다.
그 후 왕을 따라 일연 스님은 개성으로 올라가 충렬왕 9년(1283년) 일흔여덟 되던 해 국사로 책봉되었습니다.

국사의 자리에 올랐지만 일연 스님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왕에게 간청하였고, 이 간청이 받아들여지자 고향에 내려가 노모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습니다. 노모의 장례를 치른 후 일연 스님은 인각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인각사에서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완성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인각사에서 우리 고대사의 보고인 <삼국유사>의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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