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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가든 포토로그



2009/07/04 10:57

패튼 대전차군단 영화산책


쟁에서만큼 인간의 본성이 잘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전쟁은 인간의 숙명인 양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계속됐습니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갈리는 이곳에선 인간의 위대함과 추악함, 선함과 악함 등 모든 게 함께 뒤범벅이 된 채 나타납니다.

영화에 전쟁처럼 매력적인 주제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그동안 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가 숱하게 만들어졌으며,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입니다.

<패튼 대전차군단>은 그 많은 전쟁 영화 가운데 교과서와도 같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1970년 당시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주연상, 각본상, 편집상, 무대감독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빠삐용>을 연출한 바 있는 프랭클린 J. 샤프너가 감독을 맡았고, 각본은 전쟁 영화의 대표작인 <지옥의 묵시록>을 만든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맡았습니다.

- 오마 브래들리 장군(칼 말덴)과 조지 패튼 장군(조지 C. 스콧)


영화는 괴팍하면서도 독특한 '패튼'이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전쟁 당시의 상황을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장대한 스케일로 실감 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제리 골드스미스의 긴박감 넘치는 음악까지 곁들여서 그야말로 금상첨화로 말입니다.

요즈음은 CG와 같은 게 워낙 발달하여 굉장히 장대한 장면들도 실내에서 컴퓨터로 뚝딱 만들기도 하지만, <패튼 대전차군단>이 만들어질 당시엔 CG라는 것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장면들은 수많은 엑스트라를 직접
동원하여 촬영해야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공들여 만들어진 장면들은 CG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또 다른 사실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예전의 영화가 요즈음 영화보다 더 무게가 있어 보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조지 C. 스콧에 의한, 조지 C. 스콧을 위한, 조지 C. 스콧의 영화입니다. 그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벅 터지슨 장군 역에 출연하기도 하였으나, 이 영화 한 편을 위해 배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착각이 들 만큼 너무나 완벽하게 패튼 장군 역을 소화해냈습니다. 실제로 조지 C. 스콧이 조지 패튼 장군인지, 조지 패튼 장군이 조지 C. 스콧인지 모를 정도로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조지 C. 스콧의 연기는 실재 인물을 대상으로 한 영화에서 배우는 그 인물을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조지 패튼 장군의 실제 모습


그러면 이 영화 속의 주인공 조지 패튼 장군은 실제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그는 1885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으며, 남북전쟁 당시 윈체스터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f Opequon)에서 전사한 '조지 스미스 패튼' 대령이 그의 할아버지입니다. 패튼의 어머니 또한 집안에 항상 남북전쟁 당시의 남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과 '스톤월 잭슨' 장군의 초상화를 걸어두었으니, 어린 시절 패튼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풍 탓에 어렸을 때부터 그는 전쟁에 대한 방대한 역사책들을 접하였고, 장래 희망 또한 군인이었습니다.


버지니아 군사 학교에서 1년을 수학한 그는 미 육군 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로 진학하였습니다. 패튼은 난독증이 있는데다 성적이 좋지 않아 유급을 당한 적도 있지만, 1909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1917년 11월 미 육군 최초의 기갑부대가 편성이 되자 패튼은 이 부대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귀국한 패튼은 20여 년간 여러 보직을 거치면서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기갑전의 중요성을 계속 주장하였지만 전후 축소된 군사예산과 대공황의 여파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 육군이 펼친 전격전으로 폴란드와 프랑스가 어이없이 무너지자 미국은 황급히 기갑전력을 확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패튼은 1940년 제1기갑여단의 지휘를 맡았고, 이 부대는 이듬해 제1기갑사단으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전차 훈련소 교장으로 부임한 패튼은 미군의 기갑전 교리를 확립하고 본격적으로 기갑부대를 양성하였습니다.


1943년 캐서린 패스 전투(Battle of the Kasserine Pass)에서 롬멜 장군의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게 대패한 미군은 1943년 3월 6일 패튼을 중장으로 진급시켜 제2군단의 지휘를 맡겼습니다. 군단장에 부임한 패튼은 무기력과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장병들을 다그쳤습니다. 역대 미군 장성 중에 가장 거칠고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부하들에게 직설적이고 때론 품위 없는 욕설을 가차없이 쏟아냈습니다.

규율만큼 군인을 단련시키는 것이 없다고 확신한 그는 휘하의 부하 전체, 심지어는 군의관과 취사병에게까지 철모를 쓰게 하였고 넥타이를 착용하도록 했습니다. 모든 장병들은 매일 면도를 해야 했으며, 규정대로 단정하게 군복을 착용해야 했습니다. 이런 방침 때문에 패튼의 인기는 사라져갔지만, 잃어버렸던 군인의 자존심은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고함만 지른 것이 아니라 병사들과 뒤엉키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진흙탕에 빠진 트럭을 병사들과 함께 밀어올렸고, 고장 난 탱크를 고치려고 전차병들과 함께 전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진흙투성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 탱크 옆에 서 있는 패튼 장군


1943년 3월 중순 패튼 장군의 부대는 반격을 감행하여 독일군을 격퇴하자, 패튼 장군의 미국군과 몽고메리 장군의 영국군 사이에 끼어 압박을 받던 독일 아프리카군단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성공으로 패튼 장군은 제7군의 지휘를 맡아 1943년 7월 시실리 침공에 나섰습니다. 천성적으로 지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 탓에 시실리 작전 내내 영국군의 몽고메리 장군과 경쟁이라도 벌이듯 군대를 몰아댔습니다.


상승일로에 있던 그의 경력에 최대의 오점을 남긴 것도 시실리에서였습니다. 야전병원을 방문 중이던 패튼이 전투피로증(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에 걸려 입원하고 있던 두 명의 병사를 겁쟁이라며 구타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 구타사건이 발단이 되어 지휘권까지 박탈당했습니다.

1944년 1월 영국으로 파견된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장하기 위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부대의 지휘관을 맡았습니다. 싸움꾼 패튼이 다시 지휘봉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로, 제3군 사령관을 맡으면서부터였습니다. 1944년 8월1일 그는 아브랑셰에서 교두보를 돌파한 후, 보름 만에 팔레즈-아르장탕 갭 지역에서 10만 명의 독일군을 포위했고, 동쪽으로 진군하여 8월 말에는 사르 강에 도달했습니다. 가장 탁월한 야전군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의 일입니다.


종전을 반년 앞둔 1944년 12월,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로도 알려진 아르덴 대공세에서 독일군은 25만 병력을 투입하여 곧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던 연합군 장병들의 허를 찔렀습니다. 연합군의 취약부를 돌파한 독일군은 뮤즈(Meuse) 강 방면으로 깊숙이 진군하였고, 바스토뉴(Bastogne)에 고립된 미 제101공수사단은 전멸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이에 패튼의 제3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습니다. 패튼 지휘하의 전차와 병사들은 폭설로 눈이 쌓인 길을 하루에 70~80킬로미터씩 돌파해 나가 고립된 제101공수사단을 구출해 낸 후, 퇴각하는 독일군을 쫓아 독일 본토로 진입했습니다. 이렇게 제3군이 라인 강을 건넌 것은 1945년 3월 22일의 일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패튼은 독일 바바리아주 군정장관이 되었고, 그는 평소 생각대로 히틀러보다 더한 '동방에서 온 훈족 야만인들', 즉 소련이 유럽을 지배하기 전에 이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발언을 되풀이해 미군 수뇌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은 패튼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고, 1945년 12월 9일 귀국을 하루 앞두고 동료 장군들과 만하임(Mannheim) 교외로 꿩 사냥을 나갔던 패튼은 자신을 태운 캐딜락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때 패튼은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어 의식을 잃고 군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2일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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