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모펫이 소장했던 사진들 가운데 경복궁 광화문 앞 거리의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광화문(光化門)은 법궁인 경복궁(景福宮)의 정문입니다. 지금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화문까지 넓디넓은 세종로가 뚫려 있습니다. 세종로 동편에는 미국 대사관, 문화체육관광부가 있고, 서편에는 세종문화회관, 정부중앙청사 별관과 같은 건물들이 높이 들어서 있어, 위의 사진처럼 산자락에 감싸 안긴 경복궁의 모습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동편으로는 기로소, 호조, 한성부, 이조, 의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서편으로는 자예원, 공조, 형조, 사헌부, 병조, 예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거리를 육조거리라 하였습니다. 사진을 보면 육조거리에서 경복궁으로 들어서기 전 광화문 앞쪽을 보면 길 양옆으로 해태가 한 마리씩 서 있습니다. 당시 해태의 위치는 평소 우리가 아는 위치와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해태는 중국 고대부터 전해오는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본래 뿔이 하나이고 성품이 충직하여 시시비비를 잘 가려주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해태를 사헌부 대문 앞에 돌로 조각하여 세웠습니다. 이는 그 앞을 지나 궁궐로 들어가는 관원들에게 행동을 바르게 하고, 옳은 말을 하도록 무언의 요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부터는 궁궐의 영역이므로 왕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탈것에서 내리라는 하마(下馬)의 표식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Old Kyongbok Palace guard tower on southeast corner.
사진은 경복궁 동십자각을 경복궁 내에서 찍은 모습입니다.
동십자각(東十字閣)은 당시 사진으로도 알 수 있지만 원래 경복궁 담장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던 망루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동십자각 외에 서십자각도 있었는데, 담장이 축소되면서 서십자각은 없어지고 지금처럼 동십자각만 경복궁 사거리 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게 된 것입니다.
지금 동십자각이 서 있는 위치를 고려할 때 지금의 광화문은 원래 위치에서 조금 안으로 눌러앉은 것이고, 경복궁의 동쪽 담장은 상당히 더 물러앉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은 경복궁내에 있는 향원정의 모습입니다.
자경전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계속 들어가다 보면 커다란 연못이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 둥그런 섬이 하나 떠 있고 거기에 육모 지붕을 한 이층짜리 정자인 향원정(香遠亭)이 있습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섬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취향교(醉香橋)인데, 지금의 다리 모습과는 다릅니다. 그 이유는 원래 있었던 취향교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없어져서 1953년에 다시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 다리는 모양뿐만 아니라 위치 또한 달라졌습니다. 당시 연못 북쪽에 건청궁이 있었는데 취향교도 이에 맞추어 연못의 북쪽에 있었습니다만 다시 세우면서 지금처럼 남쪽으로 옮겼습니다.

사진은 집옥재(集玉齊)의 모습입니다.
건청궁 터에서 야트막한 담장을 넘겨다보면 신무문 동쪽에 옛 건청궁에 속했던 건물인 집옥재가 있습니다. 왼쪽에 팔우정과 오른쪽에 협길당이 있는 이 건물은 고종이 서고 겸 서재로 썼던 중국풍의 화려한 건물입니다.
원래는 팔우정과 협길당과 함께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졌으나, 1888년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함께 이전되었습니다. 고종은 이곳에 선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습니다.

사진은 건청궁의 모습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건물은 명성황후와 하녀들이 거처하였던 황후의 여궁(與宮)인 옥호루(玉壺樓)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찍은 시기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난 이후로 보입니다.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고종 10년)에 지었습니다. 경복궁 중건 사업은 대원군이 주도했던 반면에 건청궁의 건설은 고종이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건청궁은 왕으로서, 정치가로서 스스로 서려는 고종의 자립 의지의 징표라 할 수 있습니다.
건청궁은 우리 민족의 울분이 서려 있는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1895년(고종 32년) 8월 20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가 이끄는 일본 공사관 직원, 일본군, 일본 낭인, 조선 신식군대인 훈련원 등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이 건물 저 건물을 모조리 뒤진 끝에 경복궁의 뒤쪽 끝 건청궁의 한 건물인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어 찔러 죽이고, 그 시신을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으로 끌고가 석유를 끼얹어 태웠습니다.
1929년 일제는 이런 자신들의 만행을 지우기라도 하듯 경복궁에서 대규모 박람회를 열면서 건청궁 일대를 헐어 없애버렸습니다. 이후 한동안 건청궁 터는 빈터로 남아 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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