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순교의 안과 밖 문화·유적

- 이차돈 순교비

라에서 불교는 당시 사람들에겐 공기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불교가 신라에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신라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이차돈의 순교'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은 이후입니다. 그만큼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 불교에 있어 전환점이 된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흥왕 14년(527년)에 일어난 이차돈의 순교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백률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이차돈 순교비(異次頓 殉敎碑)라고도 말하는데, 이차돈이 순교한지 290년이 지난 818년(헌덕왕 10년)에 세운 육면체 모양의 비석입니다.

이 비석의
여섯 면 중 다섯 면에 글씨를 새겼으나 마멸이 심하여 제대로 읽기 어려운 실정이며,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풍만한 관복을 입은 어떤 사람이 두 손을 팔짱을 끼고 허리는 꾸부정한 채로 서 있는데, 잘린 목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있으며,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대지 위에는 관을 쓴 머리가 그대로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이차돈이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순교했을 때, 그 목이 날아와 떨어진 곳이 경주 북쪽에 있는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고 하며, 당시 신라인들은 이차돈의 죽음을 슬피 여겨 이 산의 좋은 터에 그를 위하여 자추사(刺楸寺)란 절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절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분명치는 않으나, 지금의 백률사가 옛 자추사가 아닌가 하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차돈 순교비의 모습처럼 당시에 과연 그런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잘린 목 한가운데서 흰 젖이 솟아올랐다"란 표현은 중국 원위(元魏) 때인 472년에 번역된 불교책인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이나 445년에 번역된 <현우경(賢愚經)>에 비슷한 내용이 있으므로, 이 부분은 아무래도 후대에 윤색이 된 듯합니다. 이런 문헌의 기록이 아니더라도 잘린 목에서 흰 젖이 솟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차돈이 자신의 죽음 뒤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법흥왕을 설득하는 장면은 누군가가 그의 죽음을 신비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실제 이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이차돈의 순교가 일어난 법흥왕대보다 100여 년 전입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력을 빌어 백제나 왜국의 침략을 격퇴하였고, 고구려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성장해나갔습니다. 불교도 이런 과정에서 고구려로부터 들어왔으며, 최초의 전도자는 묵호자(墨胡子, '까만 오랑캐 사람'이라는 뜻, 아도(阿道) 스님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음)였습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가 급변하여 장수왕대의 고구려가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자, 신라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 계통의 불교에 대해서도 신라 지배층은 경계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 신라 지배층은 이념적으로 무교(巫敎, 샤머니즘)에 가까웠는데, 자연히 불교와 사상적으로 충돌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신라사회는 커다란 발전상을 보여 경주 일원에서 경상도 일대를 석권하는 큰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라는 국가권력의 재편과 함께 새로운 이념체계가 필요하였고, 법흥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은
불교야말로 이런 필요성에 가장 적합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전통적인 귀족세력의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불교에 대해 느끼는 문화적 이질감과 함께 불교행사에 따른 막대한 경비 지출과 인력의 낭비를 이유로 신라가 불교를 인정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이차돈은 매우 급진적인 방식을 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정치세력 간의 합의 없이 당시 무교의 성지인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베고 거기에다 흥륜사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이에 귀족세력들이 강력하게 반발함으로써 마침내 그가 모든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숙청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그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는 신라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급속히 발전해나갔습니다.

이 이차돈의 죽음을 생각할 때, 그의 죽음이 결과적으로는 불교를 위한 순교가 되었지만 사실은 희생양에 가까운 죽음이 아니었을까요? 기적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차돈의 순교에 대해 종교적 관점에서 기술한 삼국유사의 <염촉멸신(
厭觸滅身)>을 살펴보면, 그 과정이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보면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즉위한 14년(527년)에 신하 이차돈(異次頓)이 불법(佛法)을 위해서 자기 몸을 죽이니, 곧 소량(蕭梁) 보통(普通) 8년 정미(丁未, 527년)에 서천축(西天竺)의 달마대사(達磨大師)가 금릉(金陵)에 온 해다. 이 해에 낭지법사(朗智法師)도 또한 영취산(靈鷲山)에 살면서 법장(法場)을 열었으니 불교의 흥하고 쇠하는 것도 반드시 원근(遠近)에서 한 시기에 서로 감응한다는 것을 이 일로 해서 알 수가 있다.

원화(元和) 연간(
806~824년)에 남간사(南澗寺)의 중 일념(一念)이 <촉향분례불결사문(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곳에 이 사실이 자세히 실려 있으니 그 대략은 이러하다.

예전에 법흥대왕이 자극전(紫極殿)에서 왕위에 올랐을 때에 동쪽 지역을 살펴보고 말했다. "예전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감응되어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들어왔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백성들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려 한다." 이에 조신들(향전(鄕傳)에서는 공목알공(工目謁恭) 등이라 했다)은 왕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大義)만을 지켜, 절을 세우겠다는 신령스러운 생각에 따르지 않자 대왕은 탄식했다. "아아!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왕업(王業)을 이어받아 위로는 음양(陰陽)의 조화(造化)가 모자라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즐기는 일이 없어서 정사를 닦는 여가에 불교에 마음을 두었으니, 그 누가 나의 일을 함께할 것인가?"

이때 소신(小臣)이 있었는데, 성(姓)은 박(朴)이요, 자(子)는 염촉(
厭觸, 혹은 이차(異次)라 하고 또는 이처(伊處)라고도 하니, 방음(方音)이 다르기 때문이다.)인데,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조부(祖父)는 아진(阿珍) 종(宗)으로 습보(習寶) 갈문왕(葛文王)의 아들이다. (신라의 관작(官爵)은 도합 17등급인데, 그 넷째를 파진손(波珍飡), 또는 아진손(阿珍飡)이라고도 한다. 종(宗)은 그 이름이며, 습보(習寶)도 역시 이름이다. 신라 사람은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葛文王)이라고 했으니, 그 까닭은 사신(史臣)도 역시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상고해 보면, 사인(舍人)은 그때 나이 26세였고, 아버지는 길승(吉升), 조부는 공한(功漢), 증조(曾祖)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했다.)

그는 죽백(竹栢)과 같은 바탕에 수경(水鏡)과 같은 뜻을 품었으며, 적선(積善)한 집의 증손(曾孫)으로서 궁내(宮內)의 조아(爪牙)가 되기를 바랐고, 성조(聖朝)의 충신으로서 하청(河淸)에 등시(登侍)할 것을 기대했다. 그때 나이 22세로서 사인(舍人, 신라 관작에 대사(大舍), 소사(小舍) 등이 있으니, 대개 하사(下士)의 등급이다.)의 직책에 있었는데, 왕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그 심정(心情)을 눈치를 채고 아뢰었다. "신이 듣자 오니 옛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도 계교를 물었다 하오니 신은 큰 죄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며 사인은 말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신하로서의 큰 절개이옵고,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거짓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해서 신의 목을 베시면 만민이 굴복하여 감히 왕의 말씀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 장차 새 한 마리를 살리려 했고, 피를 뿌려 목숨을 끊어서 일곱 마리 짐승을 스스로 불쌍히 여겼다.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인데 어찌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너는 비록 공덕을 남기려 하지만 죽음을 피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사인이 말했다. "일체(一切)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신명(神命)에 지나지 않으며,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불교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은 다시 성행하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도 하늘을 뚫을 듯한 마음이 있고, 홍곡(鴻鵠)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물결을 깨칠 기세를 품었다 하니,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가위 대사(大士)의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왕은 일부러 위의(威儀)를 정제하고, 동서쪽에는 풍도(風刀)를, 남북 쪽에는 상장(霜仗)을 벌여 놓고, 여러 신하를 불러 물었다. "경(卿)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이를 지체시키지 않았느냐." (향전(鄕傳)에서는 염촉염촉이 거짓 왕명으로 신하들에게 절을 세우라는 뜻을 전하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하자 왕은 이것을 염촉염촉에게 책임지게 해 노하며 왕명을 거짓 전했다 하여 형에 처했다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벌벌 떨고 두려워하여 황망히 맹세하고 손으로 동쪽과 서쪽을 가리키니, 왕은 사인을 불러 꾸짖었다. 사인은 얼굴빛이 변하여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왕이 크게 노하여 이를 베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니, 유사(有司)는 그를 묶어 관아(官衙)로 데리고 갔다. 사인은 맹세를 했다.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으며(향전(鄕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사인(舍人)이 맹세하기를,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시므로 내가 신명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 인연을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려 두루 백성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했다. 이에 그의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金剛山) 마루에 떨어졌다고 한다.), 하늘은 사방이 어두워 저녁의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포(袞龍袍)를 적시고, 재상들은 근심하여 진땀이 선면(蟬冕)에까지 흘렀다. 감천(甘泉)이 갑자기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고, 곧은 나무가 저절로 부러져서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울었다. 춘궁(春宮)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놀던 동무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돌아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마주하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이별을 애석해 하며 관(棺)을 쳐다보고 우는 소리가 마치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그들은 모두 말했다. "개자추(介子推)가 다리의 살을 벤 일도 염촉(염촉)의 고절(苦節)에 비할 수 없으며,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도 어찌 그의 장열(壯烈)함에 비할 수 있으랴. 이것은 곧 대왕의 신력(信力)을 붙들어서 아도(阿道)의 본심을 성취시킨 것이니 참으로 성자(聖者)로다."

드디어 북산(北山) 서쪽 고개(곧 금강산(金剛山)이다. 전(傳)에는, 머리가 날아가서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장사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에 장사지냈다. 나인(內人)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땅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다. 이로부터 집집마다 부처를 받들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불도(佛道)를 행하면 이내 불교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덧글

  • 피티라메 2009/09/09 15:43 # 답글

    왕이 귀족이랑 거래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왕이 이차돈이랑도 거래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하니까
    왕이 귀족에게는 이차돈을 가지고 거래했을것이고,이차돈에게는 불교인정에 대해서 거래했을겁니다.
    그리고나서는 왕은 보다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가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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