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서기석은 화랑들의 맹세서인가? 문화·유적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신라 612년 추정, 경주 석장동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립경주박물관에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가 쉬운 유물이 하나 있습니다. 대충 지나가며 보다 보면  제법 큼직한 냇돌에 불과해 보이지만, 이 유물은 결코 평범한 냇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냇돌의 표면에 글자가 씌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유물의 이름이 무엇이냐고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라고 부르는 비석입니다.


이 비석은 1934년 5월 4일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터 부근 언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냇돌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관장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였습니다. 그는 이 냇돌을 발견한 후 박물관에 보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냇돌의 가치를 몰랐고, 따라서 이 냇돌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잠자고 있었습니다.

이 냇돌의 가치를 처음으로 안 사람은 역사학자
스에마쓰 야쓰카즈(末松保和)였습니다. 1935년 12월 18일 경주분관에 내려왔던 스에마쓰 야쓰카즈는 임신서기석을 보고는 그 내용을 판독하였고, 이로써 이 냇돌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냇돌에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는 이름도 붙였습니다

'임신년에 맹세를 기록한 돌'이란 뜻의 임신서기석은 길이 34㎝, 폭 12.5㎝의 돌에 한자를 음각하였는데, 모두  5행 7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선 어떤 내용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 궁금하시죠.

임신서기석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壬申年六月十六日二人幷誓記天前誓今自」
三年忠道執持過失无誓若此事失」
天大罪淂誓若國不安大乱世可
行誓之 又別先未年七月廿二日大誓」
 詩尙書傳倫淂誓三年」

이렇게 한자로 그냥 그대로 적어 놓으면 제대로 이해하실 분은 드물 것입니다. 다음은 쉽게 우리말로 풀어쓴 내용입니다.

임신년(壬申年) 6월 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세하여,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성의 도(道)를 확실히 잡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게 됨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할 것을 받아들임을 맹세한다. 또 따로 먼저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하였다.

이제 그 내용은 이해하셨으니, 남은 문제는 언제 누가 이것을 만들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임신서기석이 언제 만들어졌느냐 하는 문제의 첫 단서는 글자 첫머리에 쓰인 임신년(
壬申年)이란 글자입니다. 그러면 이 유물에 새겨진 임신년은 어느 시기의 임신년일까요?

임신서기석을 처음으로 해석한 일본학자 스에마쓰 야쓰카즈(末松保和)는 임신년을 통일신라시대 성덕왕 31년인 732년으로 보았습니다. 신라에 국학이 설치돼 체제를 갖춘 것이 신문왕 2년(682년)이니 만큼 그 후의 임신년이 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문제를 제기한 학자가 바로 이병도였습니다.

이병도는 임신서기석을 만든 시기를 552년(진흥왕 13년)이나 612년(진평왕 34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학이 도입되기 전부터 중국으로부터 유교경전이 광범위하게 수입돼 화랑이나 귀족 청년들이 경전을 익혔다고 보아야 하고,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대의 대문장가 강수(强首)가 <효경(孝經)>,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 등을 읽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도 있으니 이 시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신라의 다른 비석과 서체를 비교한 결과도 이병도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요?

일부에선 이것을 만든 사람이 화랑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는 각오만으로 화랑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해석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 밖에도 임신서기석에는 신라시대의 다른 비석과는 달리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글자를 모두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새겨진 문장이 순수한 한문식 문장이 아니고 우리말 식의 한문체란 점입니다.

예를 들면, 天前誓(하늘 앞에 맹세한다) 한문 문법에 맞게 쓴다면 誓前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今自三年以後(지금부터 삼 년 이후에는) 역시 원래는 自今三年以後라고 써야 합니다. 그 외에도 맹세한다는 誓(서)가 우리말 어순처럼 문장의 끝에 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문은 영어처럼 주어 + 동사 + 목적어 순의 구조인데, 임신서기석에서처럼 주어 + 목적어 + 동사 순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이것을 만든 사람이 한문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낮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 글의 일부는 <초록불의 잡학다식>의 '임신서기석에 대한 이야기'를 참고 하였습니다.

덧글

  • 무명 2009/10/09 12:05 # 삭제 답글

    모리는 그런 걸 두고 '나습羅習'이라고 부르더군요. 확실히 고려나 조선에 비해서는 한문 구사 능력이 떨어지는 시대였고, 특히 젊은이들은 더욱 그랬겠지요. 비교적 자료가 많은 일본에서조차, 공식 역사서인 일본서기도 왜식 한문이 등장하니 신라도 크게 예외는 아니었을 겁니다.
  • 뽀도르 2009/10/09 12:12 # 답글

    고려말의 삼국유사도 우리식 한문이 보인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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