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안강에 있는 흥덕왕릉을 찾아간 날은 11월 초순의 날씨답지 않게 포근한 가운데 비까지 제법 내렸습니다.
경주에는 신라 왕릉으로 알려진 많은 무덤들이 있습니다. 괘릉, 진평왕릉,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무열왕릉 등, 다 세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왕릉들이 있지만, 그 무덤의 실제 주인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무열왕릉과 흥덕왕릉, 둘뿐입니다. 괘릉과 선덕여왕릉도 거의 확실하다고 하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흥덕왕릉은 누구의 왕릉인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 외에도 신라 왕릉 가운데 그 규모나 짜임새에 있어 단연 돋보이는 왕릉입니다. 하지만, 많은 신라 왕릉 가운데 이 왕릉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흥덕왕릉은 신라 왕릉 가운데서도 거의 잊혀진 왕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이 왕릉이 경주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이처럼 흥덕왕릉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저 같은 답사자에겐 한편으로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경주에서 조금만 이름이 알려졌어도 가는 곳마다 붐비는 사람들로 짜증스러울 때가 자주 있는데, 이처럼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호젓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입니다.

아무튼 그 많은 신라 왕릉 가운데서도 흥덕왕릉은 특별합니다.
시인 송재학씨는 "흥덕왕릉에 가면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묘한 신비감 때문에 왕릉의 일부인 석물처럼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게 된다."며 "특히 비틀려 자란 소나무숲에서 천 년 시간의 침묵과 나무들의 함성이 얽힌 환상을 경험하게 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시인 송재학씨가 이처럼 찬탄한 흥덕왕릉은 경주에서 포항으로 빠지는 국도변의 드넓은 안강벌 한가운데인 안강읍 육통2리에 있습니다. 전답과 축사를 이어진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가면 마을 한가운데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이 있습니다. 동네 뒷동산처럼 여겨지는이 야트막한 소나무숲 속에 흥덕왕릉이 숨어있습니다.
이 소나무숲 속을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곳에 신라 왕릉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소나무숲 밖에서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능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소나무숲을 들어서면 심상치 않은 기운에 으스스한 한기마저 느끼게 됩니다.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소나무들의 모양 또한 기기묘묘합니다. 휘어진 나무둥지들이 모두 뒤엉키고 비틀려 마치 구렁이가 꿈틀꿈틀 거리는 듯합니다.
이 소나무들의 수령은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진 않지만 수백 년이나 된 것처럼 커다랗고 검붉은 색을 띠고 있습니다. 솔잎이 두텁게 깔린 땅에는 풀 한 포기, 잡목 한 그루도 자라지 않습니다. 흥덕왕릉을 빙 둘러 감싸고 있는 소나무숲은 직선거리로 200~300m 정도로, 한낮에도 햇빛이 거의 들지 않을 것만 같은 데 마침 비까지 내리는 날에 찾으니 더욱 어두컴컴하기만 합니다.

어두컴컴한 소나무숲을 빠져나올 때쯤이 되면 앞이 갑자기 환하게 트이면서 비로소 왕릉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왕릉의 입구를 알리는 양쪽으로 늘어서듯 있는 기다란 돌기둥입니다. 이것은 왕릉의 경계를 알리는 경계석이자 이제부터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바라다보이는 왕릉은 소나무숲 속과는 또 다른 별천지로, 훨씬 환하고 넓고 안온하게 느껴집니다.

왕릉 입구의 돌기둥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소나무숲 속으로 다시 들어가면 엄청나게 큰 돌거북(龜趺)를 볼 수 있습니다. 헌덕왕릉비로 세웠던 지름 4~5m의 이 돌거북에는 이미 비신(碑身)과 이수는 사라지고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능이 흥덕왕릉임을 알 수 있게 된 걸까요?
우선 <삼국유사>왕력편(王曆編)에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는데, 왕비 장화부인(章花夫人)과 함께 매장했다.'라고 하였으니 헌덕왕릉의 현재 위치와 대체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1977년에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 때 상당수의 비편(碑片)과 함께 '흥덕(興德)'이라 새긴 비편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비편은 이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니 지금의 귀부 위에 있었던 비신의 파편임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헌덕왕릉비는 비록 비신과 이수는 사라졌지만 어쨌든 '흥덕(興德)'이라 새긴 비편을 남겼으니 일부나마 자신의 역할을 다한 셈입니다.

흥덕왕릉에는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괘릉과 같이 무인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이 서 있습니다.
이들은 왕릉을 지키는 수문장답게 한결같이 의연하면서도 위엄이 넘칩니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인석으로, 곱슬머리에 눈이 깊숙하고 코가 우뚝한 서역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의 무인상으로 짐작건대 당시 신라가 당나라뿐만 아니라 먼 서역과도 활발하게 문물교류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인석과 무인석을 지나 왕릉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면 네 마리의 돌사자를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동서남북 네 방향을 향해 각기 다른 자세로 앉아 있는데, 그 모습들이 마치 괘릉의 돌사자를 보는 듯 많이 닮았습니다. 이들 가운데 바로 앉은 놈이 있는가 하면 옆으로 고개를 돌린 놈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한결같이 빙긋이 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어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옵니다.

흥덕왕릉은 신라 왕릉 가운데서도 그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형식 또한 완전하게 갖추어진 왕릉입니다.
능의 지름이 20.8m이고 높이는 6m에 이르니 비교적 큰 편에 속하는 왕릉입니다. 흥덕왕은 자신의 부인인 장화부인을 몹시 사랑하여 사후에 장화부인과 함께 이곳에 합장 되었다고 하니, 다른 신라 왕릉보다 흥덕왕릉의 봉분이 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비교적 큰 봉토분으로, 무덤 밑둘레를 따라 병풍처럼 다듬은 넓은 돌을 사용하여 무덤 호석(護石)을 세웠고,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습니다. 또한, 무덤 주변을 따라 돌난간을 세웠으나, 난간기둥의 위아래에도 구멍을 뚫어 끼웠던 가로돌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봉분 바로 앞의 상석은 새것으로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왠지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바꾸기 전 옛 상석은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구전으로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움푹 닳았다고 합니다. 비록 닳았을망정 차라리 그대로 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신라 제42대 왕인 흥덕왕(興德王, 826~836 재위)은 본명은 김수종(金秀宗)이며 제41대 헌덕왕의 아우로 애장왕을 몰아내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金氏)입니다. 비(妃)는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 김씨(章和夫人 金氏)였으나 즉위 직후에 죽자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하였습니다. 그의 치적으로는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았으며,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김대렴(金大廉)이 차 종자를 들여오자 지리산에 심게 하여 차 문화를 일으켰습니다.
흥덕왕은 왕비 장화부인을 몹시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죽자 슬픔에 젖어있는 왕을 보다 못한 신하들은 새 왕비를 맞이하도록 청하자, "새도 짝을 잃으면 슬피 우짖는데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고서 어찌 차마 무정하게도 다시 아내를 맞이하겠는가"라고 하며 모두 거절하였고 합니다. 그는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죽은 후에도 먼저 죽은 그녀와 함께 묻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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