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고분의 대명사, 대릉원 문화·유적

- 대릉원

주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 가운데 하나가 여기저기에 있는 거대한 고분들입니다. 이 고분들은 천 년 가까운 세월을 사람들과 함께 터전을 이루며 지내왔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스러운 감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평지에 자리 잡은 이 고분들은 당시의 다른 지역에 있는 고분들과 비교해 보아도 특이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분군들은 남산의 북쪽에서부터 경주박물관 자리와 반월성을 거쳐 황오동,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으로 이어지는 평지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릉원(大陵苑)은 규모로서 경주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경주시내 한가운데에 있어 찾기도 무척 쉽습니다. 더구나 가까이에 첨성대, 계림, 반월성, 경주 향교, 경주 최부자집 등이 있다 보니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빕니다.

대릉원에 있는 무덤들은 잔디로 잘 입혀져 있어 마치 동산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1970년대에 공원화하기 전에는 멀리서도 황남대총(皇南大塚)의 우람하고 아름다운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고 하나, 지금은 담장을 둘러치고 무덤 앞까지 주차시설을 만들어 놓아 옛 정취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대릉원에는 내부가 공개된 천마총(天馬塚)과 이곳을 대릉원이라고 이름을 짓게 한 사연이 있는 미추왕릉(未鄒王陵), 그리고 그 규모가 경주에 있는 고분 가운데 가장 크다는 황남대총 등이 있습니다. 대릉원을 만들기 전에는 이곳에 고분 말고도 무덤 자리들이 수없이 많았다고 하나 봉분이 있는 무덤들만 남겨두고 모두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 미추왕릉


미추왕릉은 대릉원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무덤입니다.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왕은 김씨 성으로는 최초로 신라 왕위에 올랐으며, 사후에 그의 능을 큰 릉, 즉 대릉(大陵)이라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미추왕릉은 대릉원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미추왕릉의 남쪽에는 삼문(三門)이 있으며, 다른 고분과는 달리 이 삼문을 따라 기와 담장이 둘려져 있습니다. 또한 왕을 제사하기 위한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794년(정조 18년)에 다시 세웠습니다.

미추왕릉은 지름이 56.7m, 높이가 12.4m로,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유석(魂遊石)과 상석(床石)이 마련되어 있고, 무덤의 내부구조는 주변에 있는 천마총, 황남대총 등의 발굴조사에서 밝혀진 것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미추왕릉


미추왕릉을 죽장릉(竹長陵), 또는 죽현릉(竹現陵)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죽엽군(竹葉軍)에 얽힌 이야기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추왕 다음 왕인 유리왕 때의 일입니다. 이서국(伊西國: 지금의 청도 지역) 사람들이 서울 금성을 공격해 왔습니다. 이에 신라는 방어를 하였으나 힘이 달렸습니다. 이때 문득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전세를 되돌려놓았는데, 적이 퇴각하고 나서 보니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그제야 선왕의 음공(陰功)임을 알고,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미추왕릉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설화도 전합니다.

혜공왕 14년(779년) 4월 어느 날,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將軍)과 같았습니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명가량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릉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 뒤 무덤이 진동하며 호소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이 변함없는데, 지난 경술년 신의 자손이 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는 군신이 저의 공렬(功烈, 드높고 큰 공적)을 잊음이라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애쓰지 않겠습니다."

이에 미추왕이 대의가 더욱 중함을 들어 설득하였더니 김유신은 다시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습니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김경신(金敬臣)을 김유신의 무덤에 보내어 대신 사과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 김유신의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사람들이 나라를 지킨 미추왕의 음덕을 사모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 지내고, 서열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 불렀다고 합니다.
- 천마총


대릉원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 천마총입니다.

천마총은 5~6세기경에 만들어진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그 구조를 보면 평지에 놓인 나무로 만든 곽 안에 시체를 넣은 다음 곽의 뚜껑을 덮은 후 밖에 냇돌을 쌓아올리고, 냇돌 위에 흙을 두텁게 덮어 봉분을 마련했습니다. 이처럼 곽을 평지에 놓고 쌓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은 천마총의 출토로 처음 밝혀진 일입니다.

1973년 발굴 당시 이곳에서 금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그 가운데 하늘을 나는 말의 그림이 있는 말다래가 출토되었습니다. 이것은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신라인의 그림솜씨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그래서 이 무덤의 이름을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천마총은 발굴 조사 후 내부구조를 알 수 있도록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출토 당시의 유물이 놓여 있었던 상태를 재현한 모형물을 직접 볼 수 있고, 또한 내부의 공간을 이용하여 중요 유물의 모조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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