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석탑과 석등 문화·유적

- 범어사 삼층석탑


어사는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오래된 절입니다. 이 이야기가 마냥 허황된 것만은 아님은 범어사 삼층석탑과 석등과 같이 오랜 세월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문화유적들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범어사 삼층석탑은 범어사 대웅전 앞에 있지만 정면에서 제법 비켜난 곳에 있습니다. 이 탑의 높이는 4m로 그다지 큰 편은 아니며,
<범어사 사적기(梵魚寺 事蹟記)>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興德王) 때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층 기단 면석에 탱주를 대신하여 안상(眼象)을 새겨넣은 점이 특이하며, 1층 몸돌에 비해 2층과 3층의 몸돌의 감축률이 뚜렷한 점도 눈에 띕니다.
- 범어사 삼층석탑


범어사 삼층석탑은 오래전 신라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치다 보니 어찌 세월의 굴곡인들 없었겠습니까?

이 탑에서의 최근 굴곡은 일제시대에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궁금할 수 있는데, 우선 아래 사진을 한 번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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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삼층석탑의 이전 모습. (사진출처: 문화재청)

사진은 이전의 범어사 삼층석탑 모습으로, 지금 모습과 다른 점을 발견하였습니까?

이 이야기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36년에 차상명이 범어사 주지가 되었고, 이듬해인 139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두 차례에 걸쳐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제를 개최하여 국방헌금과 위문금을 걷어서 내었습니다. 이때 범어사는 전국 31대 본산 가운데 경기도 용주사 다음으로 많은 헌납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 잘 보이기 위한 목적과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석탑에도 변형을 가했습니다.

대웅전 앞마당의 삼층석탑 옆에 조선총독부 표지석을 만들었으며, 원래 난간이 없는 삼층석탑에 난간을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우리식이 아니라 일본식으로 말입니다. 이때 삼층석탑의 기단부가 변형되었고, 왜색 난간이 설치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탑의 기단부를 살펴보면 단층이나 이층이 아닌 삼층으로 되어 있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입니다. 맨 아래 기단부가 추가된 때문이죠. 최근 들어서 난간은 제거되었으나, 변형된 기단부는 여전히 그대로 있습니다.
- 범어사 석등


범어사 석등은 의상대사가 문무왕 18년(678년)에 만든 것이라고들 하나, 석등의 양식으로 볼 때 범어사 삼층석탑이 만들어진 무렵에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신라말 흥덕왕 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석등은 옥개석(지붕돌)과 화사석(火舍石), 상대석(上臺石), 간주석(竿柱石), 하대석(下臺石)이 모두 팔각형을 기본으로 한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불국사 석등과 같은 양식에 속합니다. 하대석의 복련(覆蓮)이나 상대석의 앙련(仰蓮) 모두 꽃잎이 여덟 잎입니다. 그러나 이 석등은 후대에 보완된 간주석이 너무 빈약하고 상대석과 하대석의 비례가 서로 맞지 않아 전체적인 조화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의 부재들도 없어졌고 옥개석 위에 얹힌 노반(露盤) 또한 제 짝이 아닌 게 못내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석등은 금당(金堂)이나 탑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 석등도 원래는 미륵전 앞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을 일제시대에 지금 석등이 있는 자리에 있었던 종루를 옮기면서 석등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라 합니다. 따라서 이 석등의 처지는 제자리가 아닌 엉뚱한 곳에 있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와 같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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