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梵魚寺) 문화·유적

- 일주문


주문(一柱門)은 만법이 구족(具足)하여 일체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 있어 삼해탈문(三解脫門)이라고도 하며, 사찰 건물의 기본 배치에서 사찰 경내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지나야 하는 문입니다. 따라서 일주문을 기준으로 해서 승과 속의 경계가 이루어집니다.

범어사 일주문도 여느 절처럼 범어사 산문 밖 입구에 있습니다. 범어사 일주문은 네모꼴로 되어 있는 일반적인 기둥 배치와는 달리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것이 특징입니다. 일렬로 된 네 개의 높은 초석 위에 짧은 기둥을 세워 다포(多包)의 포작(包作)과 겹처마로 많은 무게를 가지는 지붕을 올려놓음으로써 자체의 무게로 지탱케 하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 소나무


범어사(梵魚寺)는 금정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큰 절입니다.

범어사의 유래에 대하여는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 등 조선 초기의 각종 지리지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금정산 산마루에 우물이 있어 그 물빛이 금색이고 그 속에 금색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놀았다 하여 산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그 아래에 절을 지어 범어사라 하였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설화에는 다 같이 범어사 창건의 구체적인 설명과 그 연대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범어사의 발자취에 관한 문헌으로는 <범어사창건사적(梵魚寺創建事蹟)>과 <고적(古蹟)>이 한 권으로 된 목판본이 있는데, 간행연대는 조선 숙종 39년(1700년)으로 그리 오래된 기록은 아니나 범어사에 오래전부터 전해온 자료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엮은 책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 두 기록은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신라 흥덕대왕 때 왜구를 퇴치하기 위하여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창건연대에 대하여 <창건사적>은 신라 흥덕왕 때라고만 하였고, <고적>에서는 당 문종 태화 19년 을묘(乙卯), 신라 흥덕왕 때라고 명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당 태화(太和) 연호는 9년까지이며, 그 9년이 바로 을묘년이므로 이는 당 태화 9년(신라 흥덕왕 10년(835년))의 와전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대체로 범어사의 창건연대를 이때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으며, 현재 범어사에 남아있는 석탑과 석등 등 석조 유물의 양식도 이 연대와 부합되므로 흥덕왕 때 범어사 창건설에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흥덕왕보다 1세기반이나 앞선 시대의 인물인 의상대사를 범어사 창건에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일견 모순된 기록으로 볼 수밖에 없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합니다.


의상대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년) 당나라 유학에서 귀국하여 문무왕 16년(676년) 52세 때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화엄의 중심도량으로 삼고 전국의 10대사찰에 전교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화엄십찰(華嚴十刹)인데, 그중에 '금정지범어(사)(金井之梵魚(寺))'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범어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이때 이미 범어사란 절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범어사는 문무왕 때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그 후 흥덕왕 때 중창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현재 범어사에는 이 초창기에 해당하는 석조유물이나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이 하나의 의문으로 남습니다. 이 점에 대해선 초창기의 범어사 절터를 지금의 위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추정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만일 이런 추정이 맞는다면 범어사에 초창기의 유물이 전혀 없는 현실과 흥덕왕 때 창건설이 생긴 이유가 모두 해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흥덕왕 때 이후 범어사의 변천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이나 전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큰 변동 없이 천 년의 법통을 이어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타버렸고, 그 뒤 10년이 지난 1602년 재건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화재로 전소하였다고 합니다. 1613년 가을에 다시 재건한 것이 현재의 범어사입니다. 이후에도 사세의 확장에 따라 크고 작은 증축과 수축공사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 괘불대


절의 뜰에 당간지주와 비슷해 보이는 돌기둥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괘불대라고 하는 것인데,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됩니다.

범어사와 같이 큰 절에 큰 행사가 열리면 많은 신도 수로 대웅전이 비좁기 마련입니다. 이때 불상 대신에 두루마리 그림 형태의 부처, 즉 괘불을 대웅전 앞마당에 걸어두고 행사를 치르는데, 이 괘불을 걸어두는 곳이 바로 괴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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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독성·나한전

범어사 경내에는 독특한 모양의 건물이 하나 있는데, 팔상·독성·나한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으로, 1706년 이래로 존속해 온 건물입니다. 1902년 조사된 자료를 볼 때, 당시까지는 천태문(天台門)을 중심으로 양옆에 각각 팔상전과 나한전이 따로 있었지만, 1905년 11월부터 1906년 11월까지 공사를 하여 지금과 같이 하나의 건물로 되었습니다.

1906년에 단장한 독성전 부분은 하나의 통재를 사용해서 반원형으로 구부려 문틀을 만들었고, 창방 사이의 삼각형 벽체 부분에는 통판으로 덩굴 모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출입문도 아름답고 화려한 꽃무늬 문살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 팔상전 내부


팔상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 가운데 여덟 장면을 그린 탱화와 불상을 모신 곳입니다. 이곳에 모시는 불상은  석가모니부처님과 함께 좌협시에 미륵보살, 우협시에 제화갈라보살을 모십니다.

범어사 팔상전 역시 석가여래상과 두 보살상과 함께 탱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불단을 포함한 그 규모는 대웅전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나름대로 짜임새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골목길


범어사 남쪽 외곽에서 북쪽인 대웅전으로 가는 골목길입니다. 밤새 내린 잔설로 하얗게 덮인 먼 산의 모습이 아직도 겨울임을 실감케 합니다.
- 당간지주


범어사 당간지주는 범어사 산문 밖에 있습니다. 당간은 당을 달기 위한 장대인데, 당간을 세울 때 양쪽에서 이를 지탱하도록 세운 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 초기인 10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이며, 기단부는 파괴 되었습니다. 지주의 상단부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홈이 패여져 있고, 바깥쪽 모서리는 약간 둥글게 다듬어졌습니다. 이 당간지주는 아무런 치장도 없지만 소박한 조형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덧글

  • gpalddlwkd 2010/04/08 07:32 # 삭제 답글

    퍼가요~
  • 귤이 2010/04/21 14:21 # 삭제 답글

    정리 완전 잘 하셨네요... 숙제에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 ss 2010/07/12 20:35 # 삭제 답글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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