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통일신라 왕릉의 시원(始原), 성덕왕릉 문화·유적

- 성덕왕릉


라 제33대 성덕왕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왕입니다. 그 이유는 '에밀레종'이라고 부르는 종의 원래 이름이 '성덕대왕신종'이라, 그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 하기 때문입니다.

성덕왕이 승하한 후,
아들인 효성왕(신라 제34대)이 부왕의 공덕을 기리고 그 명복을 빌고자 봉덕사(奉德寺)를 세웠고,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신라 제35대)이 그 절에 달려고 구리 12만 근으로 종을 만들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혜공왕(신라 제36대)이 아버지(경덕왕)의 뜻을 이어받아 할아버지인 성덕왕을 위해 이 종을 완성하였습니다. 성덕대왕신종이 완성되는 데는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종 표면에 명문(銘文)이 양각으로 돋을새김이 되어 있는데, 첫머리에 '聖德大王神鍾之銘(성덕대왕신종지명)'이라 되어 있습니다.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은 신문왕(신라 제31대)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신라 제32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나라와 외교를 활발히 하여 국력을 튼튼히 함으로써, 삼국을 통일한 이후 가장 평화롭고 살기 좋은 시절을 이루었으니 문화면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성덕왕이 35년이나 나라를 다스리다 승하하자 백성들이 슬퍼하며 후히 장사를 지냈습니다. 능의 위치가 <삼국사기>에는 이거사(移車寺) 남쪽이라 했고,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동촌(東村) 남쪽(양장곡(楊長谷)이라고도 한다)에 있다고 했습니다.
- 성덕왕릉


성덕왕릉은 경주역에서 울산으로 통하는 7번국도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있는 한국광고영상박물관 동쪽의 철로 건너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능은 이후 신라 왕릉의 규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왕릉 양식의 시원(始原)이 되었습니다.

성덕왕릉의 밑둘레는 52m로, 봉분더미가 무너지지 않도록 아래쪽에 돌로 호석을 두르고, 12지상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바깥으로는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만들었고, 능 앞쪽에는 잘 다듬은 돌로 안상이 새겨진 상석(床石)을 설치하였습니다. 잘 다듬어진 높은 상석이 능 앞에 놓이기 시작하는 것은 이 능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신문왕릉(사실은 효소왕릉일 가능성이 높음)만 해도 상석은 여러 개의 돌을 쌓아 낮게 만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왕릉의 호석은 벽돌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둥글게 쌓고 받침돌로 받쳐 놓았는데 반해, 성덕왕릉은 여러 장의 벽돌모양 돌 대신에 한 장으로 합친 넓고 큰 돌로 아랫부분을 둘러싸고 이 판석이 넘어지지 않도록 턱이 지게 도드라진 기둥돌을 30개 세웠습니다. 이 기둥돌은 무덤 안쪽으로 들어간 부분을 길게 하여 '돌못'이라 부를만한 생김새로 되어 있습니다. 이 돌못을 더욱 튼튼하게 하도록 옆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된 두꺼운 돌 30개를 밖에서 기대어 받쳐 놓았습니다.
- 효소왕릉
이라 표시된 무덤


현재 성덕왕릉 바로 곁에
효소왕릉이라고 표시된 무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덤은 효소왕이 죽자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지냈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왕릉으로 보기엔 너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효소왕은 신문왕의 맏아들이자 성덕왕의 형인데, 이처럼 초라하게 능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망덕사터 바로 동쪽에 있는 신문왕릉이라고 하는 능이 오히려 효소왕릉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신문왕릉은 어디 있을까요? 다시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돌아가 보면, 신문왕이 죽자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록에 따라, 신문왕릉은 낭산 동쪽인 황복사지(皇福寺址) 아래에 십이지석이 남아 있는 폐왕릉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 십이지상


성덕왕릉에는 특이하게도 호석 사이사이에 '둥글새김'이 된 12지상을 배치하였습니다. 이는 신라의 능묘 가운데 단 하나뿐인 둥글새김 12지상입니다. 지금 10개의 상은 목이 떨어져 나가고 없고, 사진에 보이는 유(酉, 닭)상은 조금 파손이 되었지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완전한 모습의 신(申, 원숭이)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능의 12지상은 모두 무사들이 입는 옷을 입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당당한 모습으로 앞쪽을 응시하며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12지상들이 서 있는 위치를 자세히 살펴보면, 호석 받침돌 가운데만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오른편에 붙어 있는 것, 왼쪽에 가까이 있는 것 등으로 들쑥날쑥입니다.

이것은 무얼 말하는가 하면, 효성왕 때 처음 만든 무덤 호석에다가 나중에 12지상을 만들어 세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경덕왕 때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경덕왕 13년(754년)에 성덕왕릉에 비(碑)를 세웠다."라고 했으니, 다른 석물(石物)인 바닥돌, 돌난간, 12지상, 문인석, 상석, 돌사자 등도 이때 다듬어 설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간혹 12지상의 위치가 들쑥날쑥인 것이 후대에 옮긴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가지만, 처음부터 제자리라는 것이 실측을 해 본 결과 드러났습니다. 무덤 둘레의 받침돌은 원(圓)둘레에 맞게 30등분한 위치에 세웠고, 12지상은 방위에 맞게 12등분된 방향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12지상을 배치하려고 계획하여 능을 만들었다면, 받침돌 개수가 12, 24, 36으로 12의 배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12지상을 만들어 세웠다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 돌사자


능의 둘레에는 네 마리의 돌사자가 동서남북을 향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돌사자는 나중에 만들어진 괘릉이나 흥덕왕릉의 돌사자와 그 생김새가 크게 다르지 않아, 세월은 흘러도 그 모습이 서로 비슷한 게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합니다.

- 문인석


능의 입구에는 좌우로 문인석과 무인석을 배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문인석 하나는 제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나머지 하나는 크게 파손되어 상반신만 남아 있는데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문인석 또한 괘릉이나 흥덕왕릉에서 볼 수 있는 문인석과 그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성덕왕릉 귀부


능에서 약 100m 남쪽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이 엎드려 있습니다. 이 돌거북의 머리는 떨어져 없어졌고, 등 위에 있었던 비석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비록 몸체만 남았지만 이 돌거북의 모습은 여전히 늠름하고 당당합니다. 원래 제모습을 지녔다면 얼마나 멋졌을지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 돌거북 발가락


돌거북의 발가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돌거북의 앞발가락은 다섯이지만 뒷발가락은 넷인데, 이는 거북이 힘차게 나갈 때 뒷발의 엄지발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고 힘을 주는 모습을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태종무열왕릉의 귀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훌륭하고 뛰어난 왕릉을 꾸미는 착상을 하고 만들 수 있었던 시기는 경덕왕 때가 아니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당시 신라는 불국사를 만들고 석굴암의 석굴을 창안하여 생동감 있는 조각을 하였던 시기이니 선왕의 무덤도 이처럼 새로운 양식으로 화려하게 꾸밀 수 있었던 것이겠죠.

- 글 일부는 <거품돌의 경주이야기>에서 가져와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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