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릉 솔숲 길을 거닐며... 문화·유적

- 경덕왕릉 소나무숲 길


라시대 왕릉을 찾아가는 재미에는 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숲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숲 속에서 마치 용이 하늘로 오르듯 구불구불하게 자란 소나무들을 바라보는 것은 왕릉 그 자체 못지않은 즐거움을 줍니다. 이런 숲이 있기에 신라 왕릉은 어느 답사지보다도 더 매력적인지도 모릅니다.

경주의 서남쪽인 내남면 부지리라는 곳에
경덕왕릉으로 알려진 통일신라시대 왕릉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경주 중심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외진 곳에 능을 썼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그 덕분에 이곳은 더없이 한적한 곳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을 아는 사람도 드물 뿐만 아니라 찾는 사람들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 경덕왕릉 소나무숲


경덕왕릉은 마을 가까이 산비탈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습니다. 마을을 조금 벗어나 경덕왕릉이 있는 언덕 위로 오르는 길가에는 소나무숲이 길손을 맞이합니다. 때마침 소나무숲 속에는 군데군데 진달래꽃들이 활짝 피어 황홀한 풍경을 연출하여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 경덕왕릉이 보이는 소나무숲 길


소나무숲과 진달래꽃이 만발한 기분 좋은 숲길을 얼마 걷지 않아 앞쪽으로 트인 곳으로 경덕왕릉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은 성덕왕(聖德王)의 아들이며, 이름은 김헌영(憲英)입니다. 형인 효성왕(孝成王)이 아들 없이 돌아가자 뒤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이 재위 24년 만에 돌아가니 모지사(毛祇寺) 서쪽 산에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능을 두고 학자들 간에는 경덕왕릉이 맞다 아니다로 서로 엇갈려 있습니다. 이런 논쟁을 잠재울 수 있는 열쇠인 모지사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월이 흐른 지금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 경덕왕릉(景德王陵)


경덕왕릉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현듯 경덕왕과 그의 아들인 혜공왕에 얽힌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덕왕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여덟 치(1치는 약 3cm)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했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는 경수태후(景垂太后)이니 의충(依忠) 각간(角干)의 딸이었다. 어느 날 왕은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오." 표훈은 명령을 받아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다시 말한다. "원컨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자 천제는 말한다. "될 수는 있지만 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하자 천제는 또 불러 말한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지금 대사(大師)는 마치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제부터는 아예 다니지 말도록 하라."

표훈은 돌아와서 천제의 말대로 왕께 알아듣도록 말했건만 왕은 다시 말한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면 만족하겠소." 이리하여 만월왕후(滿月王后)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무척 기뻐했다. 8세 때에 왕이 죽어서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나이가 매우 어린 때문에 태후(太后)가 임조(臨朝)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선덕왕(宣德王, 이름은 김양상(金良相)으로 혜공왕을 뒤이어 왕위에 오름)과 김양상(金良相, 선덕왕을 뒤이어 원성왕이 된 김경신(敬信)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임)에게 죽임을 당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