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상림 숲에 숨겨진 유적들 문화·유적

- 함화루


양 상림은 아름다운 숲 외에도 곳곳에서 우리 문화유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함화루, 척화비, 함양 이은리 석불,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등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시간 여유가 없어 한 바퀴 빙 둘러보고 나오는 바람에 척화비는 그만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함화루(咸化樓)는 원래는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인 망악루였습니다. 당시 함양읍성에는 동쪽에 제운루(齊雲樓), 서쪽에 청상루(淸商樓), 남쪽에 망악루(望岳樓), 이렇게 삼문(三門)이 있었는데, 망악루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습니다.

망악루란 이름은 '멀리 지리산(智異山)이 보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일제강점기에는 망경루(望敬樓)라고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도시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총독부에서 강제로 철거하려 하자, 1932년 고적보존회 대표 노덕영(盧悳永)이 사재를 털어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함화루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 건물은 2층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입니다. 아래층에는 자연석 주초(柱礎)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습니다. 위층 역시 두리기둥이며, 내부는 단청을 칠하였습니다.

영남의 대유학자인 김종직은 함악루의 옛 이름인 '망악루'를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작년에는 내 발자취가 저 멧부리를 더렵혔거니
망악루 위에서 다시 대면하니 무안도 하구나.
산신령은 거듭 더럽히게 될까 두려워하여
흰 구름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 이은리 석불


이은리 석불은 1950년경에 함양읍 이은리(吏隱里) 냇가에서 출토된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당시 석불이 이곳에 있었던 것은 홍수 때 사찰이 유실되면서 물에 쓸려 떠내려온 때문으로 보이며, 출토지역으로부터 약 300m 떨어진 곳에 망가사(望迦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니, 이 절의 유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석불은 광배(光背)를 갖추었으나, 배 아랫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습니다. 현재 두 손이 떨어져 나갔는데, 팔꿈치 아래에 끼우게 되어 있었던 듯 구멍이 나 있습니다. 머리는 민머리(素髮)이며, 육계가 단정하고, 두 귀는 길며,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합니다. 그리고 얼굴은 소박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얼굴에 비해 빈약한 두 어깨에는 통견(通肩)의 가사가 U자형을 이루며 두텁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타원형의 광배는 이중의 원형선을 두른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불상은 그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최치원 신도비


상림에 있는 비석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文昌侯 崔先生 神道碑)입니다.

문창후란
최치원의 시호(諡號)인 문창(文昌)에서 온 것이므로, 이 신도비는 최치원의 신도비입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7 재위) 때 천령군(지금의 함양군) 태수로 있으면서 홍수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숲을 조성하였습니다. 그 공적을 기려 세운 비석이 이것입니다.

신도비 귀부의 모습이 꽤 토속적으로 보이면서도 왠지 낯설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정여창 묘소에 있는 신도비 귀부와 닮은 때문인 듯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언뜻 보면 이 신도비는 꽤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1923년에 최씨 문중에서 세웠다고 하니 그다지 오래된 것은 아닙니다.
- 사운정


최치원 신도비 옆에는 사운정이라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 있습니다. 이 정자는 1906년(고종 46년)에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처음에는 모현정(慕賢亭)이라 불렀으나 고운(孤雲)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사운정(思雲亭)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이 정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있어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자가 이곳에 사운정이란 이름을 달고 서 있는 그 연유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지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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