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박물관 뒤뜰 한쪽에 엄청난 무게감으로 압도하는 삼층석탑이 하나 서 있습니다.
고선사터 삼층석탑이라 부르는 탑입니다. 이 탑은 그 크기는 말할 것도 없고, 탑에서 느껴지는 힘과 위엄은 실제로 그 앞에 서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 석탑을 바라보다 보면 과연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탑은 탑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는 고선사터라는 절터에 있었습니다. 보문단지에서 동쪽으로 빠지는 길을 따라 산을 하나 넘어 약 2km쯤 가면 물에 잠긴 산골짜기가 나옵니다. 암곡동(暗谷洞)이라고 하는 이곳 물속에 고선사터가 있었습니다. 1975년 댐의 건설로 덕동호가 생겼고, 이로 말미암아 절터는 물속에 잠겼습니다.

고선사터 삼층석탑이 있었던 고선사(高仙寺)란 절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절의 창건과 폐사(廢寺)에 대해서조차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 이 절에 원효가 있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수몰되기 전 고선사터 주위의 경치는 참 멋있었다고 합니다. 절터 앞으로는 북천의 지류가 흘렀고, 계곡의 암석들이 개울과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덕동댐이 건설되자 절터는 덕동호 물속에 잠기게 되었고, 절터에 대한 기억들은 단지 사진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삼층석탑과 서당화상비 귀부(誓幢和尙碑 龜趺) 등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서당화상비 귀부의 모습입니다. 신라시대의 다른 여러 귀부들처럼 이 귀부 역시 머리 부분이 달아나고 없습니다.
'서당화상비'는 원효가 머물렀던 고선사에 그가 죽고 난 후에 세워졌습니다. 이 비는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薛仲業)이 779~780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원효를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정치적 실권자인 김언승(金彦昇)의 후원으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애장왕의 재위 기간(800~808년)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 비에는 불교 교리의 발전과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한 원효의 일대기가 적혀 있습니다.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이 서당(誓幢)이어서 그를 서당화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 비의 이름 또한 '서당화상비'가 되었습니다.

서당화상비의 귀부에서 머리가 없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비는 아랫부분과와 왼쪽 윗부분이 깨어진 채 따로따로 발견되었습니다.
먼저 아랫부분은 1914년에 경주 암곡동에 있던 고선사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왼쪽 윗부분은 1968년 9월 초 경주시의 전(傳) 동천사터(東泉寺址) 근처에 있는 석용제씨 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원래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고물수집에 취미를 갖고 있던 일본인이 자신의 제지공장에 보관하였던 것이었는데, 해방 후 공장을 논으로 변경할 때 재발견되어 보관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아랫부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왼쪽 윗부분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고선사에 있었다는 서당화상비 귀부를 보다 보면, <삼국유사>의 '사복불언(蛇福不言)'에 기록되어 있는 원효와 사복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서울(경주)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있는 과부가 남편도 없이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2세가 될 때까지도 말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였으므로 사동(蛇童, 또는 뱀복, 즉 사복蛇福))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때 원효(元曉)가 고선사(高仙寺)에 있었다. 원효는 그를 보고 맞아 예를 다했으나 사복(蛇福)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이제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원효는 "좋다." 하며 함께 사복의 집으로 갔다.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布薩: 불교의식의 하나로 출가한 이에게 스님들이 보름마다 모여서 계경(戒經)을 들려주고 죄를 참회시켜 선을 기르고 악을 없애는 일)을 시키면서 계(戒)를 주게 하니, 원효는 그 시체 앞에서 빌었다. "세상에 나지 말 것이니, 죽는 것이 괴로우니라. 죽지 말 것이니, 세상에 나는 것이 괴로우니라." 사복은 그 말이 너무 번거롭다고 하니, 원효는 고쳐서 말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괴로우니라." 이에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한다. "지혜 있는 범을 지혜의 숲 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복은 이에 게(偈)를 지어 말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라수(裟羅樹) 사이에서 열반(涅槃)하셨네.
지금 또한 그 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蓮花藏) 세계로 들어가려 하네.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명랑하고 청허(淸虛)한 세계가 있는데, 칠보(七寶)로 장식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인간의 세계는 아닌 것 같았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그 속으로 들어가니 갑자기 땅이 합쳐 버렸다. 이것을 보고 원효는 그대로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현세에서의 우리의 삶이란 것이 영원에 걸쳐 있는 시간 속에서 보면 어쩌면 섬광과도 같은 한 순간의 반짝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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