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비로자나불 복장 발원문 문화·유적

- 법보전 비로자나불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사씨 집안의 친필 발원문

인사에는 쌍둥이처럼 서로 닮은 비로자나불이 한 쌍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이 두 불상의 복장(腹藏)에서 <반야바라밀다심경> 끝에 적힌 사씨 집안의 친필 발원문 2쪽이 나왔습니다. 이 발원문은 사씨 집안에서 살아 있는 부친의 무병장수와 돌아가신 백부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법보전에 있던 불상의 발원문이 눈길을 끄는데, 그것은 이 불상의 연대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발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복위선백부상서공부시랑사위왕생서방견
(
伏爲先伯父尙書工部侍郞史褘往生西方見
불문법지원인성시정해구월일봉삼보제자국자진사사겸광지

(佛聞法之願印成時丁亥九月日奉三寶弟子國子進士史謙光誌)

내용은 정해년 구월에 사겸광(史謙光)이 백부인 사위(史褘)가 극락왕생하길 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발원문에서 보이는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이라는 직책은 고려 성종 14년(995년)에 만들어져 공민왕 11년(1362년)에 없어졌으며, 국자감(國子監)은 고려 현종 원년(1031년)에 세워진 것으로 미루어볼 때, 발원문 속의 정해년은 1107년, 1167년, 1227년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언급된 사위(史謙)는 고려 인종 때 문신 문공유(?~1159)의 묘지명을 지은 인물입니다. 문공유가 죽은 해가 1159년이므로, 발원문에서의 정해년은 문공유의 죽은 해에 가장 가까운 1167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불상은 최소한 1167년 이전에 만든 것이 확실하며, 이는 국내 최고 목조불로 인정됐던 개심사 목조 아미타 좌상(1280년)보다도 최소한 100년 이상은 앞섭니다.

- 해인사 비로자나불


사실 그동안 해인사 비로자나불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분분합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었다는 것과 고려시대에 만들었다는 주장이 지금까지도 팽팽히 맞서 있습니다.

이러한 논란은 2005년 해인사가 법보전에 있던 비로자나불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목조불로 확인됐다고 발표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해인사에서 불상을 다시 칠하기 위한 작업을 하다가 불상 내부에 붙어 있는 판자에서 글씨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글씨는 세로로 왼쪽에는 '중화삼년계묘차상하절칠금착성(
中和三年癸卯此像夏節柒金着成)'이, 오른쪽에는 '서원대각간주등신○미우좌비주등신○(誓願大角干主燈身○彌右座妃主燈身○)'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왼쪽 문장은 '중화 3년 여름에 개금을 했다.'는 내용이고, 오른쪽 문장은 '(통일신라시대의 고위 관직인) 대각간의 서원으로 이 불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중화 3년은 883년에 해당합니다. 이런 근거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이라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글씨가 적힌 이 판자가 1,000여 년 전 것으로 보기엔 재질이 너무 생생하고,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복장유물이 없었으며, 우리나라에 있는 목조 불상 가운데 통일신라시대의 것은 하나도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명문을 후대에도 넣을 수도 있는 일이고, 불상의 양식 또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까지 내려올 수 있다고 보아, 이 불상이 통일신라시대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불상이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인지, 아니면 고려시대에 만든 것인지가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결론은 불상 내부의 명문 판자를 믿을 것인지, 아니면 발원문을 믿을 것인지에 달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