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산실, 군위 인각사 문화·유적

- 일연스님의 부도


위군과 영천시의 경계에 우뚝 선 화산(華山)이 서쪽 산자락을 드리운 고로면 화북리 화전동의 위천(渭川) 강변에 인각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화산의 화려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 마치 상상의 동물인 기린을 닮았으며, 절이 들어선 자리가 기린의 뿔에 해당하는 지점이라 하여 '인각사(麟角寺)'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그로부터 640여 년 뒤 일연스님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입적할 때까지 5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 일연스님의 부도


인각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일연스님의 부도일 것입니다.

이 부도는 원래는 이곳 둥딩마을 뒷산 부도골에 있었습니다.
인각사 측의 사적기와 1963년 황수영 박사의 글에 의하면, 구한말 무렵에 인각사 근처에 살던 모씨 일가가 문중의 무덤을 쓴답시고 비석을 두들겨 두 쪽을 내면서 부도도 쓰러뜨렸다고 합니다. 그 후 1962년에 군부대의 협조로 부도를 절 바깥 도로변에 옮겼고, 이를 다시 1970년대 중반에 경내로 옮겼다고 합니다.

전체적인 모양은 신라 이래 가장 보편적인 부도 양식인 팔각원당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력이 쇠퇴해가는 고려시대 말에 만든 것이라 그런지
양식적으로 퇴화하여 그 어떤 웅장함이나 화려함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 석불좌상

일연스님의 부도 바로 옆에는 석불좌상 하나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해 잘 알아보기는 어려우나 약사여래좌상이거나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여래좌상으로 보입니다.
- 일연스님 부도비의 비편


일연스님의 부도와 함께 세웠던 부도비는 지금 깨어진 몇 조각의 비편으로만 남았습니다.

이 비편은 절의 한옆 작은 비각 안에 있는데, 막상 안을 들여다보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깨어지고 동강이 난 얇은 돌덩이에 가까운 두 조각 비편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도비가 이처럼 파손된 것은 비문의 글씨가 왕희지 글씨의 집자이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비문을 탁본하느라 훼손이 심해졌고, 또한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으로 유생들이 글자를 갈아 마셨다는 얘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전하고 불완전한 대로 몇몇 옛 탁본이 세상에 알려져 있어 비문의 내용을 거의 파악할 수 있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도 일연스님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인각사에서 바라본 학소대


지금 인각사는 일연스님의 부도와 석불좌상 등이 남아 있을 뿐 변변한 문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여기저기 몇몇 집채가 짜임새 없이 흩어져 있습니다.

예전엔 절 앞뜰에 비록 완전치는 않으나 맵시 있는 석탑과 석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설익은 새 탑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절 바로 앞으로는 쉴 새 없이 차들이 달리는 도로가 놓여 있으니 뭔가 어수선하고 휑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인각사의 모습을 마주하니,
우리의 뿌리를 알게 해 준 소중한 책인 <삼국유사>의 산실이자 저자인 일연스님이 마지막으로 계셨던 곳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소홀히 대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돌아서는 발걸음이 내내 무거웠습니다.

덧글

  • 진성당거사 2010/12/20 16:36 # 답글

    보각국사비는 임진왜란 때의 훼손 보다는 조선 후기 이후 고의적으로 이루어진 훼손행위들에 의해 파손된 것이 더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연 스님의 부도 역시 일제강점기가 아닌 그 이전에 이미 도굴이 이루어진것으로 여겨집니다.
  • 하늘사랑 2010/12/20 23:09 #

    혹시 보각국사비가 지금처럼 훼손된 것은 과거 보는 선비가 이 비의 글자를 깎아내 갈아 마시면 급제한다는 미신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두고 한 것인가요?
    참, 그리고 일연 스님의 부도가 일제강점기가 아닌 그 이전에 이미 도굴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덧글을 달아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 진성당거사 2010/12/21 08:38 #

    왕희지 글씨의 집자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비문을 탁본뜨느라 훼손되기도 했고, 이런 탁본 작업 가운데 때로는 소위 쌍구가묵본이랍시고 비석의 표면에 석회를 발랐다 떼었다 하는 과정에서 비 표면이 심히 훼손되기도 했다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유생들이 글자를 갈아마셨다는 얘기도 있구요. 크고 오래된 비석들은 대개 조선시대 후기를 거치면서 이런 식으로 훼손된 사례가 비일비재한 모양입니다. (오죽하면 '영한 비이니 건드리면 화를 당한다'는 한글 경고가 새겨진 비석이 나왔겠습니까.)

    그리고, 인각사 측의 사적기와 1963년에 황수영 박사가 쓰신 글에 의하면 구한말 무렵에 인각사 근처에 살 던 모씨 일가가 문중의 무덤을 쓴답시고 비석을 두들겨 두 쪽을 내고 청조탑을 쓰러뜨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62년에 군위면사무소가 군부대의 협조로 부도를 절 바깥 도로변에 옮겼고, 이를 다시 70년대중반에 경내로 옮겼다합니다.
  • 하늘사랑 2010/12/21 12:45 #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해주니 고맙습니다.

    글 일부를 진성당거사님의 의견에 따라 수정하였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