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 문화·유적

-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


림사 경내에 있는 보조선사 창성탑비는 보조선사가 입적한 지 4년 후인 헌강왕 10년(884년)에 세워졌습니다.

전체 높이는 3.46m이고, 돌거북과 비신, 비석 머리(이수)가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보물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9세기 말 부도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귀부


비신을 받친 돌거북은 아주 엄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눈을 몹시 찌푸리며 눈초리가 위로 치켜졌으며, 콧구멍 속에서 수염이 돋아 나왔고, 입 옆에 갈퀴가 붙어 있습니다. 마치 용머리처럼 표현되었습니다. 입에는 여의주를 물었고, 곧추세운 목 앞에는 가로로 비늘이 새겨졌으며, 네 발에는 발가락이 4개씩 있습니다.

등껍질에는 육각형 귀갑문이 정연하게 조각되었고, 등 한가운데에 높직하게 비신받침을 마련하여 둘레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러놓았습니다.
- 보조선사 창성탑비


비석 머리는 가운데에 '가지산 보조선사 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는 비제가 적혔고, 양옆에는 뒤얽힌 용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아래쪽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를 조각한 띠를 둘렀습니다.
- 보조선사 창성탑비

비신에는 보조선사의 행장 등이 적혀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가지산문의 조사(祖師) 계승의식, 그것의 개창과 발전, 그리고 신라 하대 선종사상의 흐름과 성격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비문은 김영(金潁)이 지었고, 글씨는 일곱째 줄 선(禪)자까지는 김원(
金薳)이 구양순체의 해서로 쓰고, 그다음 사(師)자부터는 김언경(金彦卿)이 왕희지체의 행서로 썼다. 이렇게 한 비문을 두 사람이 쓴 것은 아주 희귀한 일인데, 비문 앞부분에 '김영이 짓고 김원이 쓰다' 라고만 하고, 끝에 가서 '7행 선자 이후부터는 김언경이 쓰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자를 새긴 사람은 승려 현창(賢暢)입니다.

보조선사(普照禪師)는 애장왕 5년(804년)에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은 김씨이고, 그의 집안은 지방의 명문이었으며, 법호(法號)는 체징(體澄)입니다. 19세에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에게 출가했고, 흥덕왕 2년(827년) 24세 때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 현재 가야산 보원사터)에서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그 뒤 설악산 억성사(億聖寺)로 가서 염거화상의 문하에서 정진하여 법인을 받았고, 희강왕 2년(837년)에 34세로 당나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당나라 이곳저곳을 다니며 선지식을 찾았지만 염거화상을 통해 전해 받은 도의선사의 법밖에 다른 법이 없음을 깨닫고 3년 만인 문성왕 1년(840년)에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20여 년 동안 염거화상이 주석하는 억성사와 도의선사가 머물렀던 진전사, 그리고 출가본사와 수계본사가 있는 태안반도 일대에서 활동했습니다.

보조선사가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가자, 헌안왕 3년(859년)에 김언경은 쇠 2,500근을 사서 비로자나불을 조성하여 봉안했습니다. 이때 헌안왕은 재물을 내어 공사를 돕게 했고, 경문왕 1년(861)에는 절을 증축했습니다. 그 후 보조선사는 20년 동안 이곳에 주석하며 초조 도의선사로부터 2조 염거화상으로 전해져 온 선지식을 높여 가지산문의 기치를 뚜렷이 세우고 헌강왕 6년(880년)에 77세의 나이로 입적했습니다. 당시 그의 제자는 8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3년 후 제자들이 선사의 행장을 지어 부도를 세우려 하자 왕은 '보조(普照)'라는 시호와 '창성(彰聖)'이라는 탑명(부도 이름)을 내리고 절의 이름을 중국 남종선의 본산인 조계산 보림사를 따서 '보림사(寶林寺)'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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