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사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문화·유적

- 무장사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산이 널리 알려지면서 지금은 주말이 되면 꽤 많은 사람이 찾지만, 무장사터는 몇 년 전만 해도 찾는 사람이 드문 매우 호젓한 곳이었습니다.

이곳
가장 후미진 곳에 비신은 없어지고 비받침과 비머리만 남은 비가 하나 있습니다. 무장사터를 찾는 사람 가운데서 이 비를 관심을 두고 살펴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그냥 휭하니 둘러보고는 보물이라고 하더니 뭐냐 하는 듯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곤 합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우리는 아는 것만큼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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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

이 비는 신라 제39대 소성왕(재위 798∼800년)의 왕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면서 그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비의 건립연대는 소성왕이 죽은 다음 해인 801년으로 추정됩니다.

무장사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양(孝讓)이 그의 숙부 파진찬(波珍飡)을 추모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절 이름을 무장사라 한 것은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안에 묻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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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사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비는 전체적으로 많이 파손되었습니다. 비신(碑身)은 없어졌고, 부서진 비받침(龜趺)과 비머리(螭首)만이 남아 있습니다. 높이는 1.33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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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받침의 앞면

비받침의 거북은 머리부분이 달아나고 없습니다. 그런데 2008년 11월 20일에 왼쪽 거북의 머리부분이 발견되었는데, 그 모양이 거북의 머리에서 용머리로 변화되어가는 중간단계의 모습을 하였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귀부에서는 거북이 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 거북 등 위에는 비신을 직접 끼워두는 곳인 비좌(碑座)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모양은 직사각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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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좌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비좌의 네 면에는 돌아가며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처럼 비좌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것은 매우 특이한 예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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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머리 앞면

일부가 깨어져 나간 비머리에는
구름 속에서 두 마리의 용이 마주 보며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두 마리 용 사이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여섯 글자가 2행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왼쪽 면에는 김정희(金正喜)의 조사기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갈 때마다 번번이 잊고 미처 살펴보지를 못했습니다.

경주부윤 홍양호(洪良浩)는 비신의 글자를 신라의 한림(翰林) 김육진(金陸珍)이 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글자 자체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자를 집자(集字)한 것이고, 김육진은 단지 문장만을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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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

처음에는 이 비의 이름을 '무장사비(鍪藏寺碑)'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비의 내용에 따라 '무장사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鍪藏寺阿彌陀佛造像事蹟碑)'라고 합니다. 이 비로 말미암아 이곳에 무장사(鍪藏寺)가 있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비는 조선 중종 25년(1530년)까지는 완전하였으나, 그 후 절이 폐사되다시피 하면서 비 또한 파손되었습니다. 영조 38년(1762년)에 홍양호가 경주(慶州) 내동면(內東面) 암곡리(暗谷里)에서 깨어진 비편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이 비편의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순조 17년(1817년)에 김정희가 경주 일대를 뒤져 그동안 소재를 알 수 없던 비편 두 부분을 다시 찾아내었습니다.

이 비편은 청나라 학자 유희해(劉喜海)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인들에 의해 무장사터 부근에서 <해동금석원>에 소개되지 않았던 또 다른 한 부분의 비편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모두 세 부분의 비편이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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