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 척화비 문화·유적

- 가덕도 척화비

가대교가 개통된 이후 가덕도는 육지와 다름없는 곳이 되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쉽게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덕도에 척화비가 있다는 사실을 안 지는 꽤 되었습니다.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가덕도 새바지로 가는 길에 그곳에 잠시 들렀습니다.

가덕도 척화비는 천가초등학교에 있습니다. 이 비는 선창(仙倉)마을에서 건축공사 중 출토되어 성북 선창마을회 소유지에 세워졌다가 1995년 12월에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비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문을 보면,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우리들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我戒萬年子孫)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丙寅作 辛未立)'라고 적혀 있습니다.
- 가덕도 척화비


척화비는 조선말 고종 때 섭정 자리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1866년, 고종 3년)와 신미양요(1871년, 고종 8년)를 겪은 뒤인 1871년(고종 8년)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지에 세웠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배격하고 쇄국을 강화하기 위한 굳은 결의를 나타내고, 백성에게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세웠습니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우리나라가 여러 나라와 통교하게 되자 일본 공사의 요구로 척화비는 철거되었습니다. 그때 척화비 대부분이 없어졌고, 지금은 이곳 가덕도를 비롯하여 몇몇 곳에서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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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불망비

척화비 곁에는 영세불망비 3기가 있습니다. 가덕도 절제사 이두용(李斗鎔), 오신묵(吳信默), 이우성(李雨成)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입니다.
조선말 고종 때 이곳 가덕도에서 근무했던 관리들의 공덕을 기려 세운 것들입니다.
- 은행나무


천가초등학교가 있는 이곳은 조선시대에 가덕진성이 있던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학교 담장의 일부가 비록 많이 무너져 내렸지만 가덕진성의 성벽으로 되어 있습니다.

척화비 바로 옆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마치 척화비를 보살피듯 서 있습니다. 그 크기로 보아 나무의 나이가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아마도
조선시대 가덕진성이 있었을 당시에도 이 나무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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