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의 비석들 문화·유적

- 동래 남문비

산시립박물관 뜰에는 여러 석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몇 비석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먼저 동래 남문비입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을 기려 세운 것으로, '동래충렬비'라고도 합니다.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다음 머릿돌을 얹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비몸이 많이 훼손되었고, 머릿돌은 옆에 따로 놓여 있습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길준이 썼으며, 비의 제목은 이정영이 썼습니다.

이 비는 현종 11년(1670년)에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弄珠山)에 처음 세워졌습니다. 숙종 35년(1709년)에 별사(別祠) 앞뜰로 옮겨졌으나, 영조 12년(1736년)에 별사가 없어지면서 남문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후 1976년에 시가지 도로확장공사로 부산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비문에는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당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부산진첨사 정발의 죽음, 동래부사 송상현의 의연한 죽음, 비장 송봉수·김희수·향리 송백·교수 노개방·유생 문덕겸·양통한의 순절, 양산군수 조영규의 절의 등 왜병과의 처절한 싸움과 동래부 군·관·민의 순국 충절을 기록하였고, 비를 세우기까지의 경위도 밝혔습니다.
- 동래부사 유심 선정비

동래부사 유심 선정비입니다.

이 비는
1649년~1651년에 동래부사를 지낸 유심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조선 효종 2년(1651년)에 세워졌으며,
받침돌, 비몸, 머릿돌 모두 훼손됨이 없이 잘 보존되었습니다. 동래읍성 서문 자리에 있었던 동래전화국 뒤에 있었으나, 훼손의 우려가 있어 2001년에 부산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전체적으로 비몸에 비해 머릿돌과 받침돌이 다소 작은 편이며, 조선시대의 서민적이고 해학적인 면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부산지역에 세워진 선정비로서는 규모가 큰 편에 속하고, 당시의 조각 양식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 약조제찰비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입니다.

이 비는 조선 숙종 9년(1683년)에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이 왜관(倭館)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처리를 놓고 대마도 도주와 5개 항의 약조를 체결한 후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직사각형의 비몸이 세워져 있습니다. 원래는 용두산 공원 동쪽에 있던 것인데, 1978년에 부산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5개 항의 약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출입을 금한 경계 밖으로 넘어 나온 자는 크고 작은 일을 논할 것 없이 사형으로 다스린다. 둘째, 노부세(路浮稅, 노점상의 자릿세)를 주고받은 것이 발각되면 준 자와 받은 자를 모두 사형으로 다스린다. 셋째, 시장을 열었을 때 각 방에 몰래 들어가 암거래를 하는 자는 피차 사형으로 다스린다. 넷째, 5일마다 여러 가지 물건을 공급할 때 아전·창고지기·통역 등은 일본인을 붙들어 끌어내어 때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다섯째, 피차 범죄인은 왜관 문밖에서 함께 형을 집행한다. 왜관 내에 있는 사람 가운데 만약 일이 생겨 왜관 밖으로 나가야 할 때는 왜관의 관리에게 보고하고 통행증을 가지고 조선 측의 훈도(訓導)에게 보임으로써 왕래할 수 있다.

- 부산진 척화비

부산진 척화비입니다.

부산지역에는 이 척화비 외에도 기장 척화비와 가덕도 척화비가 있습니다. 이 척화비는 고종 8년(1871년)에 부산진성터에 세워졌습니다. 1924년에 용두산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78년에 부산시립박물관으로 다시 옮겨졌습니다.

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이를 자손만년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지어 신미년에 세움.(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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