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중명전 문화·유적

- 정동극장

명전(重明殿) 일대는 덕수궁을 확장할 때 가장 먼저 궁궐로 편입된 곳이지만, 덕수궁과 중명전 사이에 이미 미국공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던 터라 별궁처럼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공사관은 지금 미국대사관저로 변해서 중명전은 미국대사관저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 중명전은 덕수궁과는 완전히 떨어져 있습니다. 경술국치 후 덕수궁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이 건물은 육지로부터 떨어져 나간 외딴 섬처럼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덕수궁 밖으로 나와서 정동극장 왼쪽에 있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조금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 덕수궁 중명전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좌절과 국권 수호의지가 담긴 곳입니다.

이 건물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하여 1897년에 지은 2층의 붉은 벽돌집입니다. 덕수궁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입니다. 처음에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렸으며, 황실도서관이었으나, 1904년 대화재로 고종이 임시로 기거하면서 연회장이나 외국 사절의 접견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중명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06년 이후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고, 1906년 2월 1일에는 일본 통감부가 개설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첫 통감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리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복원 전의 중명전

이 건물은 1925년 4월 불이 나서 전소하여 다시 지은 후 외국인을 위한 사교 클럽으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광복 후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가 1963년에 고종의 차남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되었습니다. 1977년에 민간에 매각되어 한때는 서울센터 빌딩의 별관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다시 인수한 후 2007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제대로 복원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중명전 뒷모습

중명전의 뒤쪽 모습입니다.

여담이지만, 덕수궁(德壽宮)은 엄밀히 말하자면 궁궐 이름이 아닙니다. 고종에게 붙인 궁호(宮號)로서, 황제위에서 밀려난 고종을 가리키는 칭호일 뿐입니다. 따라서 궁궐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이라 해야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들 덕수궁으로 부르고 있으니 이 글에서도 그에 따릅니다.
- 중명전 회랑


중명전 건물에는 앞쪽과 양옆으로 긴 회랑이 있습니다. 사진은 옆쪽에 있는 회랑의 모습입니다.

- 중명전 내부 전시실

중명전 내부 전시실의 모습입니다. 이 전시실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에 특사로 파견한 것을 설명한 전시실입니다.
- 중명전에 전시된 을사늑약문


중명전의 전시물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을사늑약문입니다. 이 조약의 체결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밤, 일제는 덕수궁 안팎에 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고 당시 고종이 기거하고 있던 중명전에서 고종과 대신들에게 보호조약에 조인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날 일본공사 하야시가 이미 일본대사관으로 대신들을 불러 협약 체결을 종용하였으나 오후가 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하자 덕수궁에서 어전회의를 열었습니다.

공포 분위기 속에 열린
어전회의에서도 고종과 대신들이 조인을 거부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는 세 번에 걸쳐 고종을 협박하였습니다. 고종이 끝내 거부하자 이토는 찬성하는 대신들(을사오적)만 데리고 11월 18일 새벽에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고종은 이 문서에 서명이나 옥새를 찍지 아니함으로써 끝까지 이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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