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 문화·유적

- 옥산서원 역락문

락당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습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이언적은
중종 25년(1530년) 김안로 세력에 밀려난 뒤 낙향하여 이곳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을 짓고 은둔하며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호를 자계옹(紫溪翁) 또는 자옥산인(紫玉山人)으로 짓기도 했습니다. 자계는 독락당 옆에 있는 내를 말합니다. 김안로가 사사된 후 다시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명종 즉위 후 양재역 벽서사건(1547년)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선조 5년(1572년)에 경주부윤 이재민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한
사당을 지금의 자리에 세웠습니다. 이 사당은 2년 후 선조 7년(1574년)에 임금으로부터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서원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취해 앞쪽에 강의하는 공간을 두고, 뒤쪽에 사당을 두었습니다. 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마주합니다. 역락문은 <논어>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불역락호(不亦樂乎,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취한 이름입니다. 편액 글씨는 한석봉이 썼습니다.
- 무변루


역락문을 지나면 문루인 무변루
(無邊樓)가 있습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2칸, 2층 규모의 누각 건물입니다.
2층 누각으로는 마당에서 나무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습니다. 통나무로 만든 이 나무 계단은 병산서원 만대루의 나무 계단과 닮았습니다. 볼수록 앙증맞습니다.
- 무변루 통나무 계단과 편액


무변루 실내에 '무변루(無邊樓)'라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무변풍월(無邊風月)'에서 따온 당호인데, 글씨는 한석봉이 썼습니다.

이 편액을 자세히 보면, 한쪽에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도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무변루란 당호에 대해 주석한 것으로,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나중에 따로 추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노수신의 이런 주석글은 옥산서원의 다른 편액에도 있습니다.
- 구인당


무변루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마주 보이는 건물이 구인당(求仁堂)입니다. 강학공간의 중심이 되는 건물입니다.
 

구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입니다. 건물 정면에 '옥산서원'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곳에서 학문의 토론이나 유림의 회합과 같은 여러 행사가 이루어졌습니다.
- 구인당의 편액들


구인당에는 여러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위쪽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직전인 54세에 쓴 것입니다. 헌종 5년(1839년)에 원래 편액이 화재로 타버리자 김정희가 다시 쓴 것을 임금이 하사하였습니다. 이 글씨는 기교는 남김없이 떨어져 나가고 굳센 힘만 가득해 철판도 뚫을 듯하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가운데 편액은 구인당 안쪽에 걸려 있는 편액입니다. 불타기 전 원래 편액을 모각한 것입니다.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고 합니다. 김정희가 쓴 글씨보다 살집이 두툼해 보입니다. 하지만 서로 닮았습니다. 아래쪽 '구인당(求仁堂)'이라고 쓴 편액은 한석봉이 쓴 것입니다. 그 옆의 주석글은 노수신이 썼습니다.

그런데 '옥산서원'이라고 쓴 두 편액은 다른 편액과는 달리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임금이 하사한 편액이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 정료대

이곳 마당 한쪽에 정료대(庭燎臺)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야간 행사로 이곳 마당을 밝힐 때 여기에 관솔불을 피웠습니다.
- 비각


옥산서원 뒤쪽에 이언적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둔 사당인 인묘(體仁廟) 옆입니다. 원래 서원 앞 개울 옆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하여 이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 신도비는 선조 10년(1577년)에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뜻을 모아 세웠습니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이 글을 지었고,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글을 썼습니다.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당시의 것으로는 매우 웅장하면서도 뛰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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