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박물관 야외에 보기 드물게 큰 석조(石槽)가 있습니다.
그 크기가 일반 석조의 약 2배 크기에 달합니다. 석조의 겉면을 보면, 위쪽은 매끈하게 다듬어졌으나 아래쪽은 비교적 거칠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부분이 땅속에 묻힌 부분이라 그렇게 한 모양입니다.
이 석조는 흥륜사터에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석조의 뒤쪽 테두리에 새겨져 있는 명문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흥륜사터를 읊은 김시습의 시 한 편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염집으로 변한 터에 오직 석조만 남았구나. - 김시습(金時習)
보리 이삭 패어 옛터를 덮었는데 麥秀漸漸雍故墟
사인(舍人)의 공적은 어디서 찾을꼬? 舍人功業竟何居
들리는 닭과 개의 시끄러운 소리 至今鷄犬喧齋粥
문득 그 옛날 불경 외는 듯하구나. 便是當詩誦佛書
석조는 고달프고 가마는 불기를 잃었는데 石槽遇困廓辭炎
허물어진 전각 터는 여염집으로 변하였구나. 殿閣餘墟化里閭
속인은 스님에 보시하고 스님은 속인에 보시하듯 俗古施僧僧施俗
윤회의 보덕 또한 의심할 바 없구나. 輪回報德亦無嫌
* 사인(舍人): 순교 당시 이차돈(異次頓)의 직명

이 석조에는 여러 곳에 명문이 있습니다. 모두 조선시대에 새긴 것들로, 당시 풍류를 반영한 듯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앞면에 커다랗게 가로질러 새긴 '천광운영(天光雲影)'이란 명문입니다. 이것은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를 뜻합니다. 이 글귀는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 나옵니다.
관서유감(觀書有感) - 주자(朱子)
반 이랑 크기의 네모난 연못에 하나의 거울이 열려 半畝方塘一鑑開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같이 어울려 돌고 天光雲影共徘徊
묻노니 물이 어찌 그리도 맑은가 했더니 問渠那得淸如許
살아 있는 물은 흘러오는 근원 있어서라 하네. 爲有源頭活水來

석조의 앞쪽과 뒤쪽 테두리에도 명문이 있습니다. 먼저 앞쪽 테두리에는 멋진 시 한 수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교방의 '석련지'라는 시입니다.
석련지(石蓮池) - 이교방(李敎方)
이요당 앞 쌍 석분은 二樂堂前雙石盆
어느 해 옥녀가 머리 감던 그릇인가? 何年玉女洗頭盆
머리 감던 옛사람은 가도 연꽃은 피어나 洗頭人去蓮花發
헛되이 남은 향기 빈 그릇에 가득하네. 空有餘香滿舊盆
숭정 무자년(1648년) 유두날 소호 이교방 崇禎戊子流頭 蘇湖 李敎方

뒤쪽 테두리에 있는 명문은 석조의 유래에 대한 것입니다. 조선 인조 16년(1638년) 경주부윤이었던 만회(晩悔) 이필영(李必榮, 1573~?)이 흥륜사터에 있던 것을 옮겨와 연꽃을 심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신라시대 흥륜사에 있던 것으로, 폐사된 후 가시 속에 던져져 천여 년이 지났다. 숭정 무인년 겨울에 운반해와 즐길 도구로 연꽃을 심었는데, 나타나고 사라짐이 수차례다. 인광릉후인 만회가 기록하다.
此乃羅代興輪舊物寺廢抛在荊棘中者幾千餘載 崇禎戊寅冬運入植蓮以爲賞玩之具顯晦有數 因廣陵後人 晩悔識
이처럼 옛 절터의 석조에 명문을 빼곡히, 그것도 드러나게 새긴 뜻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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