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사 부도군과 기성대사비 문화·유적

- 송림사 부도군과 기성대사 비각


림사 일주문에서 동쪽으로 250m쯤 떨어진 길가에 부도 몇 기가 모여 있습니다. 송림사 부도군입니다.

이곳에 비각이 하나 있습니다.
기성대사 비각(箕城大師碑閣)입니다. 그 옆에는 4기의 부도가 있습니다. 모두 조선시대의 석종형 부도로, 송림사에 주석했던 스님들의 부도입니다. 그러나 어떤 스님의 부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송림사 부도군


이곳 부도들은 생김새가 모두 엇비슷합니다. 크게 눈에 띄는 게 없습니다. 모두 고만고만합니다.
- 송림사 부도


4기의 부도 가운데 가장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부도입니다. 이것은 상륜부가 몸돌과 한 돌로 되어 있어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생김새가 종 모양이라기보다는 길쭉하게 생긴 고구마 같습니다.
- 송림사 부도


이곳 부도 가운데 하나에는 몸돌 윗면에 둥근 모양의 사리공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 기성대사 비각


이곳 비각 안에는 비가 모셔져 있습니다. 기성대사비입니다. 기성대사비가 이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 부도들 가운데 하나가 기성대사의 부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기성대사비


기성대사비의 모습입니다. 비에는 전서로 '기성대사비명(箕城大師碑銘)'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비에 새겨진 글자는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비는 조선 영조 48년(1772년)에 세워졌습니다.

기성쾌선(箕城快善, 1693~1764)은 조선 후기의 스님입니다. 다음은
비의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내용 가운데 '환향(還鄕)'과 '보은(報恩)'은 그가 남긴 <염불환향곡>과 <청택법보은문>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기성대사(箕城大師)를 품에 안아 서쪽에서 전해져온 발우(鉢盂)를 대사에게 전해 주었도다.
경(經)을 꿰뚫어 보고 율(律)에 서성거리니 그 품은 뜻이 눈에 사무치도다.
산봉우리 구름 위 기상이 납의(衲衣)에 가득하니 성품은 오직 하나이니 공적(空寂)뿐이로다.
응하는 속에 어떠한 사물(事物)도 없으니 오직 아미타불(阿彌陀佛)뿐이로다.
환향(還鄕)과 보은(報恩)의 두 편을 모아 하나의 유(酉)로 하도다.
팔만의 부처님 뜻이 함께 갈무리되어 있으니 자비로 시골 마을이 이롭게 되었도다.
좌해(左海)의 대중들이여 모두 한 곳으로 돌아오도다.
진리를 보호하고 번뇌를 건져주기를 59년간 하시도다.
뛰어난 파도가 팔공산에 휘도니 길이 부처님이 진호(鎭護)하는 곳이로다.
신령스런 유골을 세상에 뿌리니 한스러움의 회(悔)라는 글자가 선명한 빛깔의 실처럼 빛나도다.
서술을 맡아보는 것은 비록 공(空)한 일이지만 공경(恭敬)을 바쳐 말을 늘어놓도다.
욕심이 있는 자, 이 한 조각 돌을 방편 삼아 보기를 바라노라.

기원후(紀元後) 3번째 임진(壬辰)년 3월 일에 세움.
대시주(大施主)
정헌대부(正憲大夫) 행동 지중추부사(行同 知中樞府事) 김상구(金尙九)
증 가의대부(贈 嘉義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 겸(兼)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 김의신(金義信)
증 통정대부(贈 通政大夫)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 김언석(金彦碩)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