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주 자산리에서 고산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서쪽으로 1km 넘게 산허리를 돌아들어 간 곳에 안산영당(安山影堂)이 있습니다. 이곳은 세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한 깊고 외진 곳입니다.
안산영당은 조선 선조 14년(1581년)에 성주이씨인 이현배(李玄培)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중수했다고 전합니다. 이곳에 성주이씨 가운데 나라에 공헌한 사람들의 영정 사진을 봉안하였습니다.

안산영당은 원래 성주 월항면 인촌리에 있었던 농소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의 묘 앞에 있었습니다. 이장경은 성주이씨의 중시조입니다. 그런데 이장경의 묘에 세종대왕 왕자 태실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장경의 묘를 성주 대가면 옥화리 능골로 이장하게 되었고, 함께 있던 묘각은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뒤 숙종 6년(1680년)에 임금이 '안산서원'이란 이름을 내려 주었고,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을 피하려고 고종 5년(1868년)에 이름을 '안산영당'으로 고쳤습니다.

산속 깊이 숨은 이곳을 굳이 찾은 것은 이곳에 있는 석불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의 안산영당은 절터에 들어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절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불 하나가 안산영당 조금 위쪽 길가의 보호각에 모셔져 있습니다.

석불은 보호각 안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보호각 크기에 걸맞게 자그마한 불상입니다. 안산영당 보수공사 중에 발견되어 이곳에 별도의 보호각을 짓고 모셨다고 합니다.
이 일대는 안봉사(安峯寺) 절터로 알려졌습니다. 실상사 편운화상 부도에 "창건조사 홍척(洪陟)의 제자이며, 안봉사(安峯寺)의 개창자인 편운(片雲)의 부도이다. 정개(正開) 10년(910년) 경오년에 세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안봉사는 경북 성주군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미루어볼 때 이곳이 바로 편운화상이 창건했다는 안봉사가 있었던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의 일은 또 다른 일을 불러일으킵니다. 안산영당은 세종대왕 왕자 태실에 쫓겨 이곳으로 오게 되었고, 안봉사 절터는 안상영당에 쫓겨 그 흔적조차 잃었습니다. 어쩌겠어요.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요.

석불은 대좌도 광배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힘든 시절을 말해주듯 떨어져 나간 머리를 다시 붙인 자국이 뚜렷합니다.

석불의 얼굴은 둥글고 원만합니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졌고, 눈, 코, 입은 세월의 무게로 닳아 희미해졌습니다. 법의는 우견편단을 하였습니다. 왼손에 약합을 들고 결가부좌 자세로 앉았습니다.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가만히 얼굴을 한 번 들여다보세요. 보이세요? 부드러운 웃음이... 가만히 입가에 번진 미소와 빙긋이 웃는 눈웃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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