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문화·유적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동 쌍계사에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입니다.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를 크게 중창한 진감선사를 기리는 비로, 우리나라 금석문의 으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지금 비는 대웅전 앞마당에 있습니다. 귀부와 비신, 그리고 이수가 모두 남아 있으나, 비신이 부분적으로 깨어져 외곽을 철제 틀로 덧붙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사산비명은 '네 군데 산(山)에 남긴 비석의 글'이라는 뜻입니다. 즉 신라 말 최치원이 남긴 네 곳의 비명(碑銘)을 말합니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가 그것입니다.
- 이수 앞면

비의 이수 앞면에는 마주 보는 두 마리의 용이 실감 나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앙화와 보주가 올려져 있습니다.
- 전액

전액(篆額)에는 전서체로 '양해동고진감선사비(敭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최치원의 글씨입니다.
- 비문

비문 역시 최치원이 짓고 썼습니다. 새긴 이는 승(僧) 환영(奐榮)입니다.

'유당신라국고지리산쌍계사 교시진감선사비명병서(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 敎諡眞鑑禪師碑銘幷序)'로 시작되는
비문이 해서체 글씨로 쓰였는데,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납니다. 내용은 진감선사의 입당 구법 과정과 830년 귀국 후 지리산 화개곡에서 선법을 펼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귀부 머리

귀부는 빼어난 비신 글씨에 미치지 못합니다. 사실감과 생동감이 약합니다. 머리는 용머리이고, 목은 짧습니다.
- 귀부 머리

정수리에는 뿔을 따로 만들어 꼽았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습니다.
- 귀부 등과 발

등에는 큼직한 육각 귀갑문이 있습니다. 발은 작고, 힘이 없어 보입니다.
-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문성왕 12년(850년) 정월 9일 새벽에 진감선사는 "만법이 다 공(空)이니 나도 장차 갈 것이다.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는 힘써 노력하라.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지 말고 명(銘)으로 자취를 기록하지도 말라."는 말을 마치고는 앉아서 입적하였습니다. 그때가 나이 77세요, 법랍이 41년이었습니다. 이에 제자 법량(法諒) 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모시고는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진감선사의 입적 후 헌강왕은 시호를 진감선사(眞鑑禪師), 탑명을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추증하였습니다. 헌강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강왕은 당시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게 하면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습니다. 비는 정강왕 2년(887년) 7월에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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