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후사포리 은행나무 etc.

- 밀양 후사포리 은행나무 암나무

양 부북면 남서쪽에 후사포리(後沙浦里)가 있습니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밀양박씨의 집성촌입니다. 이곳은 예전에는 삽포리라 하였고, 마을 앞 밀양강 변에는 포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에 오래된 은행나무 2그루가 있습니다. 이 은행나무는 암수 은행나무로,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 후사포리 은행나무 암나무

예림서원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나무가 암은행나무입니다.
- 후사포리 은행나무 수나무

박양춘 여표비각 쪽에 있는 나무가 수은행나무입니다. 암은행나무에서 북쪽으로 약 50m 떨어져 있습니다.

- 후사포리 은행나무 수나무

2그루의 은행나무는 박익(朴翊, 1332~1398)의 아버지 박영균(朴永均)과 작은아버지 박세균(朴世均)이 심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은행나무의 은행(銀杏)이란 글자에서 각각 1자씩 따서 밀양박씨 은산공파(銀山公派)와 행산공파(杏山公派)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의 수령이 약 300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이야기와는 시간상으로 약 300년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밀양 고법리에 있는 박익묘

밀양 사포리에서 태어나 밀양 고법리에 묻힌 박익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그는 공민왕 2년(1352년) 이색(李穡)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나이로는 이색보다 네 살 어리고, 이성계보다 세 살, 정몽주보다 다섯 살이 많았습니다. 비록 문인이었지만, 이성계와 함께 전장에 나가 남으로 왜구를, 북으로 홍건적과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벼슬은 예문춘추관과 직제학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던 해에는 예조판서를 역임했습니다.

그가 예조판서를 지내기 전 고향인 밀양 송계마을(지금의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송악마을)에 은둔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정몽주가 찾아왔는데, 그가 정몽주에게 건넨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송계마을 숨은 선비 집을 찾아오셨소(來訪松溪隱士家)/ 석양에 문은 닫혀 있고 꽃이 지는데(夕陽門掩落花多)/ 술통 앞에 두고 나의 깊은 마음을 묻는가(樽前問我幽閑意)/ 주렴 밖에 반쯤 보이는 저 청산이 내 마음이라오(簾外靑山半面斜)

정몽주가 타살되고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열자 그는 또다시 송계마을로 내려왔습니다. 뒷산이 송악(松岳)이고, 마을이 송계(松溪)인 것은 송도(松都)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그에게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연달아 내리며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눈멀고 귀먹었다는 핑계를 대며 태조가 내린 교지와 예관을 보지도 않고 거절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좌의정을 내렸으나 역시 나서지 않았습니다. 태조가 다섯 번 불렀어도 한 번도 나서질 않아 이를 '오징불기(五徵不起)'라고 하는데, 이처럼 그는 죽을 때까지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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