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영지 석조여래좌상 문화·유적

- 영지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 1740년)>와 <경주읍지(慶州邑誌, 1933년)>에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전설은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건할 때 석가탑 축조를 위하여 초청되어온 백제 장인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불국사에서 동남쪽으로 직선거리로 4km쯤 떨어진 곳에 영지(影池)라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이 저수지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 속에 나오는 영지(影池)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영지를 전설 속의 영지로 보기에는 서로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 영지 석조여래좌상

어쨌든 영지 부근 솔숲에 석불이 하나 있습니다. 영지 석불입니다.

- 영지 석조여래좌상

석불은 불상, 광배,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 부분의 손상이 심한 편입니다.

- 영지 석조여래좌상

영지 석불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석불은 좌상(坐像)임에도 불신과 광배가 한 돌로 되어 있고, 광배에 큼직한 화불이 있으며, 아래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중대석 면석에 큼직한 안상무늬가 있습니다.

- 하대석

하대석 모습입니다.

윗부분에 4단 팔각 층단받침이 있고, 그 아래에 24엽의 복련(覆蓮) 연화문(蓮花文)과 팔각 기대(基臺)가 있는데, 모두 한 돌로 되어 있습니다.

- 중대석

중대석은 팔각으로, 면석마다 큼직한 안상무늬가 있습니다.

- 상대석

상대석에는 16엽의 앙련(仰蓮) 연화문이  있고...

- 상대석

그 아랫부분에 2단의 층단받침이 있습니다.

- 영지 석조여래좌상

광배는 마모가 심하여 장식무늬를 알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두 줄의 융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였고, 광배의 바깥쪽에는 화염문(火焰文)이, 안쪽에는 초엽문(草葉文)이 있으나 뚜렷하지 않습니다. 융기선 위에 단독 화불(化佛)과 두광 정상에 삼존화불이 있습니다. 이것도 마모가 심하여 뚜렷하지 않습니다.
 
- 부분

석불에서 얼굴 부위가 유독 훼손이 심합니다.

그래서 이 석불이 처음부터 미완성이었다는 말이 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이고, 지금 얼굴 모습은 자연적인 마멸이거나 고의적인 훼손으로 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 부분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였고, 자세는 결가부좌를 하였습니다.

- 영지 석조여래좌상

석불은 입불상(立佛像)이 아닌 좌불상(坐佛像)임에도 불신과 광배가 한 돌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불신과 광배가 한 돌로 되어 있는 석불은 입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며, 좌불상에서는 드뭅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과 고려 시대의 영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이 불신과 광배가 한 돌로 되어 있는 좌불상입니다. 이 2기의 좌불상도 영지 석불과 같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였습니다.

- 영지 석조여래좌상

석불은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 건장한 불신에 밀착되게 입혀진 얇은 법의, 동체의 양감과 굴곡을 강조하는 표현 등은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 석조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석굴암 본존불과 거의 같은 형식의 불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영지 석조여래좌상

영지 석불의 조성 시기는 석굴암 본존불의 조성 시기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는 8세기 후반 혹은 9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영지 석조여래좌상

아무도 없는 텅 빈 이곳에서 앞을 바라봅니다. 간간이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얼음처럼 차고 매섭습니다. 늙어갈수록 쓸쓸해져서 그런지 싸늘한 겨울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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